현대인이 처절할 정도로 나약한 생을 사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상대주의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이렇다, 저렇다, 예, 아니요”가 분명치 않습니다. 패기만만해야 할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로 표현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애매하게도 그저 “글쎄요”하고 대답해 버립니다. 바로 그러한 상대주의와 희미한 생각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 재판을 받는 그 위험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호소한 내용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온갖 비난이 쏟아지는 재판정에 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서 있습니다”

마틴 루터의 그 말은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바가 그대로 복음이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요, 내 서 있는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라면 이 자리에서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런 고백을 가지고 찬송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작곡했고, 종교 개혁 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의 비결
메시야를 작곡한 헨델은 원래 오르가니스트였습니다. 그의 연주가 워낙에 탁월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연주의 비결을 물었을 때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을 때 내 마음과 생각과 힘과 목숨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 여기서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연주합니다” 바로 여기에 인생의 행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할 때에 이 일을 위해서라면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온 정력을 다 쏟아 부은 적이 있습니까? 이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고,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할지도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점의 후회도 없이 미련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가장 행복하고 강력한 삶을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