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보는 2006 할렐루야 뉴욕복음화 대회에서 수화 통역에 섰으며 뉴욕밀알선교단에서 지난 7월초에 농아인 수화 사역을 맡게 된 이철희 목사를 만났다. 앞으로 밀알선교단에서 농아인 사역을 전담하게 될 이철희 목사로부터 농아 사역에 대해 들어봤다.-편집자주-
농아인 사역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20년 전에 고등학교 1학년 때 호기심에 수화로 대화를 나누면 재미 있겠다 싶어서 배워보기 시작했다. 결국은 배운 사람 중에 나 혼자 남게 되면서 하나님이 계속 농아인을 이 손에 붙여 주시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이 손으로 병원에 가서 통역을 통해 환자 병을 낫게 하고, 경찰서에서 문제해결을 도와주다가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보니 농아인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들어가 있었다.
그때 이 길을 안가겠다고 하나님께 반항했다. 이 길을 가고 싶지 않았던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 길이 수입이 없는 길임을 알고 있었다. 원래 내 꿈은 어렸을 때부터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서 부자가 되어 언덕 위에 그림 같은 하얀집에서 살기 원했다.
두번째는 방송 관련해 일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광고 카피라이터에 관해서 관심이 많았다. 지금도 글 쓰는 취미가 있어서 글쓰기를 좋아한다. 그것을 계기로 방송 쪽 일을 하고 싶었다.
누구나 그러듯 자기가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고 도와주겠다는 생각으로 1년 정도 농아인 사역 목회자의 길을 도망갔지만 결국 하나님께 잡히게 됐다. 그때 고생을 많이 해서 얻은 병이 속이 차가워지는 병이다. 그래서 장이 차가워 에어컨 틀면 너무 춥다. 하나님 싫다고 도망가다가 차가운 병을 얻게 되었다고 연관을 짓고 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을 할께요' 하고 마음을 먹고 금요 철야 기도 때 ‘내가 신학교 가기 원하신다면 준비가 되지 않은 저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합격시켜 주세요’ 하고 신학교 시험을 봤더니 합격이 됐다.
그래서 기왕 하는 것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1990년도에 신학을 시작했다. 신학교입학이 계기가 되어서 나름대로 농아 사역에서 지금까지 21년 동안 잔뼈가 굵게 되었다.
음성 언어는 각 나라마다 언어가 다른데 한국 수화가 따로 있나
따로 있다. 한국의 경우 수화 통역사 제도가 있다. 미국이나 일본 등. jswls 국가는 대부분 수화통역사 제도를 갖고 있고 자기 나라말로된 수화를 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수화통역사제도는 9년 전에 시작했다. 그때 내가 1회 수화 통역사 시험 합격생이다. 한국에서 이제까지 자격증 보유자만 600명 정도 될 것이다. 수화를 잘하는 사람 중 90% 이상이 자격증을 획득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뉴욕에 거주하는 한인 농아인 중 많은 수는 한국 수화를 쓴다. 일부는 미국 수화쓰기도 한다. 향후 기회가 된다면 미국수화를 배우려고 노력할 것이다. 지금 영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영어도 하고 수화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려면 몇 년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뉴욕 농아인 인구는 몇 명인가
한인만 15명 이상이 있다고 들었다. 지금까지 만난 농아인은 8명 정도이다. 내가 예배드리는 곳에 나오는 분이 2-3명이고 나머지는 아직 믿음을 가지지 못한 분도 있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것 같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분들이 보통 미국 사회에 속한 사람들로 1.5세, 2세 농아인 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많은 분들이 주변에 농아인이 있다면 뉴욕밀알선교단에 연결시켜 주는 노력을 부탁하고 싶다.
뉴욕에 농아 사역 상황은 어떤가
정확하게 말씀 드리기는 정보가 부족한데 15년 전부터 뉴욕중부교회에서 수화 통역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5년 전쯤에 통역사가 다른 곳으로 가서 농아성도가 줄었다고 한다. 중부교회에서 농아사역을 할 때는 20명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통역사가 빠지게 되면서 조금씩 줄어들었다고 들었다.
여기 밀알 선교단안에서는 아주 간혹 수화를 할 수 있는 일반인이 오면 수화교실이 열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간헐적이었으며 뉴욕밀알선교단만이 아닌 다른 기관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지금까지 뉴욕밀알선교단에서는 대부분의 장애인들을 위한 프로그램 운영이 되는데 유독 농아인들은 의사소통이 안돼서 프로그램 운영이 되지 않는다. 농아인이 와도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통역이 안돼 적극적인 참여가 되지 않아 농아인들도 불편해서 오기 싫어했다. 뉴욕 일원에서는 대부분의 장애인 관련 기관이 이런 상황이다.
뉴욕밀알선교단의 최병인 단장님도 이를 두고 기도하고 있던 차에 본인 역시 이를 위해 기도하면서 문의 메일을 보낸 이후 지속적인 교제와 관계를 유지 하다가 올해 1월에 한국에서 뉴욕에 답사를 왔다.
최병인 단장님은 이 농아인 분야가 그동안 취약했고 그렇기 때문에 농아인들이 타주로 많이 이주하지 않았는가 해서 본인에게 이 사역을 맡았으면 하셨는데 다행히 내가 목사고 수화도 하고, 또 교류를 나누며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오늘과 같이 밀알에 오게 됐다. 지금은 밀알 내부 사역과 농아인 사역을 동시에 하고 있다.
일반인이 설교를 직접 듣는 것과 농아인이 수화를 이해하는 것은 차이가 있을 텐데 어떤 차이점이 있나
결론 먼저 말하면 수화를 다 알아듣기 어렵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이 설교를 해도 그 목사님의 설교 스타일을 따라서 수화로 통역하여 설교를 전달해도 농아인들이 굉장히 복잡하고 헷갈려 하고 이해하기 힘들어 한다.
농아인 교회는 농아인의 방식이 있다. 예를 들어서 집사님이나, 장로님 앞에서, 청년들이나 한인 2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가 각각 다르듯이 농아인의 설교도 달라야 한다. 그래서 본인은 현재 기도하기를 어느 한 교회에서 예배 장소를 허락해서 농아인이 한 명이 모이든, 두명이 모이든 농아인의 모국어인 수화로 농아인 예배를 드리면 좋겠다. 물론 수화를 배우고자 하는 많은 분들이 동참 할 수 있는 일반 교회와 마찬가지이다. 다만 예배 전체가 수화로 구성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보통 일반교회에서 입으로 설교를 하면 표정과 말투와 전체적인 것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데 수화로 하게 되면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이루어 지나
보통 일반교회에서는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두 번 이상 교인들을 웃게 하는데 우리 농아인들은 웃기 어렵다. 건청인(건강한 청력을 가진 사람=일반인)에게 웃기는 얘기가 수화로 받는 농아인은 이해하기가 어려울때가 많다. 그래서 이 유머의 내용을 설명해준다.
그럼 웃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차원밖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농아인들이 웃을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있다. 바로 농아인 예배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일 것이다. 또한 농아인들이 웃을 수 있는 방식의 기쁨이라면 일반인들역시 함께 웃고 기쁨을 나눌 수 있다.
그래서 수화통역으로 전달되는 설교의 내용을 농아인이 70% 이상 이해해주면 고맙다. 가능하다면 설교자가 직접 자기 설교를 자기의 수화로 전달 했을 때 농아인들은 더욱 큰 은혜가 넘칠 것이다. 어쨌든 농아인만 모일 수 있는 예배는 있어야 한다.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농아인들의 독특한 전달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농아인 그들과 수화와 농아인을 사항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가 제공되었으면 좋겠다.
일반적으로 수화로 목회를 하는 건청인 목회자 중 대부분은 말은 하지 않고 수화만 한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말하고 수화하고 같이 연습을 시작해서 음성언어와 수화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내가 10년 넘게 농아인 교회 있었기 때문에 일반교회에서 설교하라고 하면 정말 힘들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일반교회 초청되어서 설교를 해도 손이 자꾸 올라간다. 직업병인 것이다. 그런데 농아인에게는 수천번 설교를 했기 때문에 쉬운 편이다.
본인은 3개월전 뉴욕으로 오기 전에 한국 군산농아인교회에서 11년 반을 담임목회를 하였다. 그 이전에는 서울에바다농아교회, 강릉에바다농아교회, 충남 서천농아인교회(개척), 동해에바다농아교회(개척), 중국 농아인선교 11년을 지속적으로 사역하였다. 그래서 농아인을 위한 수화 설교는 수준급이라고 생각한다.(웃음)
뉴욕밀알선교단에서 뉴욕지역 한국수화보급을 위해 월요일 낮 11시와 밤 8시, 목요일 밤7:30. 이렇게 세 타임을 개설하였다. 아직은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향후 수화를 배우신 분들을 중심으로 수화선교찬양단을 구성할 것이다. 수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표정이다. 두번째로 손이고 세번째가 옴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 수화라는 언어가 전달이 되는 것이다. 직접 수화로 해도 농아인들은 너무 빨라도 안보이고 너무 느려도 안보인다. 수화는 나름대로 농아인의 독특한 문법도 있다.
들리는 언어 같은 경우는 말하는 대로 전달이 되는데, 수화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달이 되는가(조사 은,는,이,가와 같은 언어체계가 있는지)
수화에 조사가 없지는 않지만 조사를 쓰면 농아인은 알아듣기 힘들다. 수화는 동사가 거의 90%이다. 예를 들자면 ‘노래’와 ‘노래하다’가 같은 말이다. 그래서 의사전달에 한계가 많이 있다. 동사가 많은 언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수화 체계는 조사가 미약하고 단어수가 굉장히 적다. 우리 말에 단어수가 1만개 가까이 되는 것에 비해 단어수가 1500개에서 2000개 밖에 안된다.
그러면 의견을 전달할 때 직접 들리는 언어보다 범위가 작을 것 같은데
농아인 방식으로 설교자나, 화자(話者)가 의도하고자 하는 목적의 내용을 수화로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수화가 부족하다고 신앙의 성숙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농아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실제로는 본다라는 표현이 어울릴듯) 은혜를 신앙을 갖고 금식으로 기도하고, 방언(목소리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신앙성숙은 말의 개수에 있지 않고 얼마나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전달되는 언어의 범위가 작을 것이라는 견해는, ‘한글 1개 = 수화 1개’ 라는 공식으로 대입하기 때문이다. 한글이 아닌 ‘수화’로 설교를 하게 되면 필요한 이야기는 거의 다 전달 할 수 있다. 하지만 수화를 다시 한글화(번역) 한다면 혼란스러울 것이다.
보통 농아인이 되는 것이 선천적인 것이 있겠고 후천적인 것이 있겠는데 어떻게 농아인이 되는지
농아인에게 언제부터 안들렸냐고 물으면 90%정도는 3-5살 때 부터라고 말한다. 그러면 태어날 때부터 2-3살까지는 들렸다는 것이다. 보통 어렸을 때 홍역이나 장티푸스를 앓아 청력에 이상이 온다.
본인도 들은 이야기지만 이 장티푸스를 옛말로 염병이라고 했는데, 열병이라고도 한다. 이 열병이 올라오면 온몸에 열이 땀 등등으로 배출될 때 고막에서도 열기가 분출되기 위해 고막이 파열되게 된다.
이 고막은 귀 속에 들어가 있으니 보이지 않는다. 열병이 앓고 나서 병원에 가면 이미 고막이 터진 상태이기 때문에 치료 시기를 놓쳐 청력을 잃게 된다. 그때가 보통 3-5살 사이라고 대답하는 농아인이 아주 많다.
예전에는 이렇게 청력을 상실하는 경우가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예방접종도 많이 하고 의학이 발달해 이런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다. 다른 일부의 농아인들은 후천적 요소에 속한다. 교통사고를 당하다든지 사고로 인해 청력에 심한 무리가 가해지면서 청각장애가 생기기도한다. 또한 심각한 사회 문제(농아인 사회문제)는 노인성 난청이다. 청각언어 장애가 완전한 후천적, 어느정도 선척적이라는 것에 대한 의학적 보고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농아 사역의 필요성이 있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 명령에 의해서 누구를 막론하고 복음을 세계 모든 민족에게 전달을 해야 한다. 한국에서 전세계에 나간 선교사들이 12,000여명이 된다. 전세계 곳곳에 오지까지 들어가서 선교를 할 때에 그 지역이나 동네에 있는 일부의 청각 장애인은 선교사 본인이 해당 언어의 수화를 하지 못한다면 그 농아인들은 복음을 받아 들이기 어렵다고 본다.
예를 들면 뉴욕에서 제일 큰 한인교회 훌륭한 목사님 10분이 은혜충만한 설교를 한꺼번에 한다 한들 수화 통역이나 본인이 수화를 직접 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복음을 받아드릴 수 없다.
본인은 복음을 받는 마지막 족속은 의사소통 장애를 가지고 있는 농아인이라고 확신을 한다. 전세계 어떤 사람, 어떤 장애인도 거의 다 듣는다. 그러나 농아인들은 못듣는다. 아주 훌륭한 설교라 하더라도 수화가 없으면 농아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저보고 이 길을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고 생각한다.
농아인들의 고충이 있다면
농아 가정에 가면 부모와 자녀 농아인과 의사소통이 안되고 농아인과 그 자녀들과의 의사소통이 거의 안된다. 예를 들어 한 가족에 할머니, 할아버지, 농아 부모, 자녀가 교회를 가면 각자 간다. 가족내 농아인은 따로 농아인 교회에 간다. 농아인을 포함한 한 가족을 한 교회에서 해결하기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본인이 사역할 농아인교회 역시 농아인만위한 예배 프로그램 사시사이에 일반인(가족)을 위한 프로그램 구성을 하기 위한 프로그램 인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는 대부분 큰 교회가 사정이 매우 좋은 편인 것은 사실이다. 농아인을 위한 전문인력, 그 가족들도 함께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교회 환경이 필요하다. 이 문제가 참 심각하게 마음에 남는다.
플러싱 어느 커뮤니티에도 농아인들은 단 한명도 들어가 있지 않다. 농아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따로 만들만한 농아인의 구성 숫자마저 부족하기는 해도 자기지역 커뮤니티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농아인은 아직 본적이 없다.
또한 농아인이 포함된 가족 구성원들이 수화를 배우면 좋은데 배우지 않는다. 조선시대 한국 사람들은 집에 장애인이 있으면 극복의 대상,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수치의 대상인 적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그런 경우를 보기는 어렵지만...
이는 농아인이 ‘사회화’가 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농아인만 따로 모아서 그들만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이 사화와 함께 살아 숨 쉴 수 있어야 한다는게 참 어렵다.
독특한 것은 농아인으로 형성된 사회는 마치 국가가 따로 있는 것 같다. 농아인들 안에 대통령급이 있고 국무총리급이 있고 외무부 장관급 등이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외무부 장관 격이다. 농아인이 아니면서 외부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또 이를테면 한국 농아인 협회장이 농아인의 대통령급인 셈이다.
본인이 12년 전, 군산 농아인 교회에 처음 부임했을 때 농아인은 본인의 목회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신뢰하지 않았다. 본인이 건청인이라는 이유로 받아드릴 수 없다는 것일수도 있다. 그 사람들이 본인을 자기 사람이라고 인정할 때까지가 5년이 걸렸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어디에 내놓아도 수화 베테랑이다. 그런데 농아인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과 동화되기 힘들었다. 우리교회에서 농아인 전도사님 한명을 데리고 있던 적이 있었다. 농아인 성도들은 새로 부임한 전도사님이 농아인이라는 이유로 매우 친해졌다. 본인이 거친 힘겨웠던 5년여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은 참 친하게 지냈다.
농아인들은 사회화(커뮤니티에 적극 참여하는 정도)가 되고 사회 일선에 진출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다. 그런 것들이 어려움이라면 어려움이다.
또 다른 어려움은 재정적 어려움을 무시할 수 없다. 농아인들이 의사통 문제로 사업을 할 수도 있는 것은 아니고 사업은 커녕 취업도 너무 힘들다.
농아인 목회자가 따로 있는지
내가 한국에 몸담고 있던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에는 세계 유일의 농아인 지방회인 특수지방회 내 30개 정도의 농아인 교회가 있다. 거기 30명 목회자 중에 나만 건청인이고 다른 선후배 전부 농아인 목회자이다. 전국적으로 한국에 농아인교회 목회자들은 150명 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중 20%가 건청인 목회자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20% 미만이라는 견해가 더 많다.
농아인 사역을 하는 농아인 목회자와 일반 목회자와의 차이가 있다면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발음이 좋은 사람, 안 좋은 사람이 있듯이 수화는 잘하는데 왠지 모르게 농아인이 아니라는 티가 많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발음이라 할 수 있는데 동작, 어휘력에서 많이 차이가 난다. 문장을 통틀어서 한 동작에 나오는 수화가 있는데 수화 한 개로 해결이 될 것을 3번 이상을 해야 비로소 의사소통이 되는 것이다. 이런 분들(통역자) 일수록 수화에 관한 훈련을 더욱 많이 받아야 한다.
농아인이 농아인 사정을 잘 알 수 있어서 일반인보다 설교를 잘할 것 같은데
그래서 농아인이 50점 유리하게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나도 첫 담임 목회지인 군산농아인교회에서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그들과 융화하는데 5년이 걸렸다. 나중에는 군산 농아인들이 나를 너무나 신뢰를 해줘서 그때부터는 목회가 너무 편했다.
굳이 설교만을 말한다면 훌륭한 설교를 통역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수화는 “손가락으로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닌 마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농아인이 더 설교를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크게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모국어(수화)를 쓰는 모국인(농아인)이 더 잘 통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본인은 모국어가 수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했던 농아인 사역 외에 한 다른 사역이 있다면
지난 11년 반 동안 군산 농아인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그때 중국 농아선교 사역을 병행했다. 한국에서 군산농아인교회 뿐만 아니라 인근에 다른 지역에 농아인교회를 한곳을 더 개척해서(사역자가 너무 부족해서 본인이 맡을 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부르심) 농아인 교회 두 곳을 담임하고 오전예배, 오후예배를 드리고 동시에 정식 선교사 인준을 받아 한 두 달에 한 번씩 중국 농아인 선교지에 가서 관리, 양육, 개척, 지원 등을 해 주는 동시 사역을 했다. 본인이 다녀온 중국은 44회이다.
본인이 중국에 지원하고 있는 중국농아인인 수가 2천명 이상이고 중국농아인 교회가 20개가 넘는다. 농아인 지도자는 30여명이고 자체 훈련반이 또 2-30여명이 된다. 그 중 얼마 전에 중국 남경신학교를 농아인으로는 최초로 졸업한 2명의 농아인 사역자가 중국내 최초의 농아인 목사안수를 받았다. 뿌린 열매가 이렇게 커가고 있다.
현재 중국 선교 사역은 남방으로 선교지역을 확대하고 신실한 선교사와 팀을 이뤄 소수민족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본인이 맡은 일은 중국 선교지원을 위한 미국 거주 선교사이다.
중국인은 장애인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본인이 중국 농아인과 거리에서 수화로 얘기하고 있으면 지나가는 일반인이 바보라고 놀린다. 전체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의식이 굉장히 떨어져 있다. 중국에서의 농아인 선교는 상처받고 소외된 영혼을 향해 뿌려져야 하는 것은 오로지 복음이다.
일반인이 농아인과 교제를 나누면서 주의하고 배려할 점이 있다면
주의해달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배려를 해줬으면 좋겠다. 농아인은 커뮤니케이션 장애이기 때문에 뭐든지 해주는 것보다 무슨 일이든 동참시킬 수 있도록 ‘기회’를 열러줬으면 좋겠다.
이것을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과제는 많은 사람들이 수화를 배워야 한다. 수화를 배우지 않으면 농아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이다. 돈이나 물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친절한 관심을 위해 수화를 배워야 한다.
현재 뉴욕밀알선교단에서 월요일에 오전 11시, 저녁 8시, 목요일에 저녁 7시30분에 한시간반동안 수화를 가르치는데 한달에 20불을 받고 있다. 수업료 20불 안내도 수화를 배울 수 있도록 하는데 돈을 안내면 오지 않는다. 그래서 많이 배우셔서 그들과 교제를 많이 나눔으로 농아인들 삶이 윤택해졌으면 좋겠다.
이번에 2006 할렐루야 뉴욕복음화대회에서 수역 통역을 했던데
뉴욕교협 이재덕 사무총장님께서 요청을 하셨다. 할렐루야 성회 때 본인이 수화하는 모습을 보고 은혜 받았다는 성도들이 굉장히 많았다(웃음). 대회기간 3일 동안 강단 위에서 총 10시간 서 있었다. 뉴욕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농아 사역의 전망이라든지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미국에서 한인들이 두번째로 많다는 뉴욕에 아직 농아인 교회가 없다. 하나님께서 개척을 허락해 주셔서 밀알 선교단과 연결이 되어서 초기 개척 단계에서 이렇게 일하게 된 것이라 생각이 된다.
뉴욕지역의 모든 농아인이(그 숫자가 몇이 되든 상관 없이) ‘자기들의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돕겠다. 이 일을 위해 115파운드인 이 몸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한다.
한국의 농아인 교회 목사들 가운데 40대에서 50대까지 1세대 목회이고 나는 2세대이다. 1세대 선배 농아목사님들이 이뤄놓은 농아인 교회를 2세대가 발전 시켜야 할 텐데 현재 자리에서 안주하는 자체가 너무 힘들고 바쁘다.
지는 11년 반을 군산농아인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나름대로 중견 농아인교회의 면모를 갖추면서(농아인의 숫자는 30명 이내였지만 교회의 역사는 34년이므로) 편하게 목회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편하게 목회 한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어쩌면 본인이 군산농아인교회에서 조금이라도 더 있었으면 그대로 안주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나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은 뉴욕지역 농아이 사역을 제 궤도에 안정시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리고 현재 몸담고 있는 밀알선교단 사역에 매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동시에 그토록 오래도록 꿈꿔왔던 세계 농아인선교를 위한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일반 성도들은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뭐가 필요한지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여기까지 보내신줄 확신한다.
아마도 곧 농아인 교회를 시작하고 아울러 수화를 보급을 할 것이다.
일반 교회에서 우리 밀알 선교단과 연합예배를 한번이라도 드려보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게 될 것이라 믿고 있다. 지금까지는 장애인을 생각하면 무조건 줘야 되는 사람, 불쌍하게만 생각했던 사람, 후원금을 줘야만 했던 대상으로 여겨졌다.
가끔 헌금 받아야 하는지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헌금 받아달라고 일부러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장애인 선교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 우리가 어떻게 선교를 해야 하는지 알려드리고 장애인을 통해서 일반 사람들이 받은 은혜라는 것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여러분들의 교회가 밀알 선교단의 장애인을 초청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다. 밀알선교단이 일반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회복시키기 위한 초대라고 믿는다. 장애인들과 한번도 예배를 드려본적 없는 교회라면 지금 빨리 이 축복의 통로를 경험하길 소망한다.(아래 밀알선교단 연락처 참조)
개척교회, 큰 교회 상관없이 저녁예배 오후예배에 장애인들이 참석해서 함께 신앙의 교류를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나야 한다. 또한 여기 밀알선교단에 격려 전화 한 통화라도 해주신다면 많은 힘이 많이 될 것 같다. 뉴욕밀알선교단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은혜로운 일들이 많이 있다.
문의 : 뉴욕밀알선교단 718-445-4442, 917-991-0703
농아인 사역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20년 전에 고등학교 1학년 때 호기심에 수화로 대화를 나누면 재미 있겠다 싶어서 배워보기 시작했다. 결국은 배운 사람 중에 나 혼자 남게 되면서 하나님이 계속 농아인을 이 손에 붙여 주시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이 손으로 병원에 가서 통역을 통해 환자 병을 낫게 하고, 경찰서에서 문제해결을 도와주다가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보니 농아인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들어가 있었다.
그때 이 길을 안가겠다고 하나님께 반항했다. 이 길을 가고 싶지 않았던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 길이 수입이 없는 길임을 알고 있었다. 원래 내 꿈은 어렸을 때부터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서 부자가 되어 언덕 위에 그림 같은 하얀집에서 살기 원했다.
두번째는 방송 관련해 일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광고 카피라이터에 관해서 관심이 많았다. 지금도 글 쓰는 취미가 있어서 글쓰기를 좋아한다. 그것을 계기로 방송 쪽 일을 하고 싶었다.
누구나 그러듯 자기가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고 도와주겠다는 생각으로 1년 정도 농아인 사역 목회자의 길을 도망갔지만 결국 하나님께 잡히게 됐다. 그때 고생을 많이 해서 얻은 병이 속이 차가워지는 병이다. 그래서 장이 차가워 에어컨 틀면 너무 춥다. 하나님 싫다고 도망가다가 차가운 병을 얻게 되었다고 연관을 짓고 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을 할께요' 하고 마음을 먹고 금요 철야 기도 때 ‘내가 신학교 가기 원하신다면 준비가 되지 않은 저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합격시켜 주세요’ 하고 신학교 시험을 봤더니 합격이 됐다.
그래서 기왕 하는 것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1990년도에 신학을 시작했다. 신학교입학이 계기가 되어서 나름대로 농아 사역에서 지금까지 21년 동안 잔뼈가 굵게 되었다.
음성 언어는 각 나라마다 언어가 다른데 한국 수화가 따로 있나
따로 있다. 한국의 경우 수화 통역사 제도가 있다. 미국이나 일본 등. jswls 국가는 대부분 수화통역사 제도를 갖고 있고 자기 나라말로된 수화를 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수화통역사제도는 9년 전에 시작했다. 그때 내가 1회 수화 통역사 시험 합격생이다. 한국에서 이제까지 자격증 보유자만 600명 정도 될 것이다. 수화를 잘하는 사람 중 90% 이상이 자격증을 획득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뉴욕에 거주하는 한인 농아인 중 많은 수는 한국 수화를 쓴다. 일부는 미국 수화쓰기도 한다. 향후 기회가 된다면 미국수화를 배우려고 노력할 것이다. 지금 영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영어도 하고 수화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려면 몇 년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뉴욕 농아인 인구는 몇 명인가
한인만 15명 이상이 있다고 들었다. 지금까지 만난 농아인은 8명 정도이다. 내가 예배드리는 곳에 나오는 분이 2-3명이고 나머지는 아직 믿음을 가지지 못한 분도 있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것 같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분들이 보통 미국 사회에 속한 사람들로 1.5세, 2세 농아인 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많은 분들이 주변에 농아인이 있다면 뉴욕밀알선교단에 연결시켜 주는 노력을 부탁하고 싶다.
뉴욕에 농아 사역 상황은 어떤가
정확하게 말씀 드리기는 정보가 부족한데 15년 전부터 뉴욕중부교회에서 수화 통역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5년 전쯤에 통역사가 다른 곳으로 가서 농아성도가 줄었다고 한다. 중부교회에서 농아사역을 할 때는 20명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통역사가 빠지게 되면서 조금씩 줄어들었다고 들었다.
여기 밀알 선교단안에서는 아주 간혹 수화를 할 수 있는 일반인이 오면 수화교실이 열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간헐적이었으며 뉴욕밀알선교단만이 아닌 다른 기관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지금까지 뉴욕밀알선교단에서는 대부분의 장애인들을 위한 프로그램 운영이 되는데 유독 농아인들은 의사소통이 안돼서 프로그램 운영이 되지 않는다. 농아인이 와도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통역이 안돼 적극적인 참여가 되지 않아 농아인들도 불편해서 오기 싫어했다. 뉴욕 일원에서는 대부분의 장애인 관련 기관이 이런 상황이다.
뉴욕밀알선교단의 최병인 단장님도 이를 두고 기도하고 있던 차에 본인 역시 이를 위해 기도하면서 문의 메일을 보낸 이후 지속적인 교제와 관계를 유지 하다가 올해 1월에 한국에서 뉴욕에 답사를 왔다.
최병인 단장님은 이 농아인 분야가 그동안 취약했고 그렇기 때문에 농아인들이 타주로 많이 이주하지 않았는가 해서 본인에게 이 사역을 맡았으면 하셨는데 다행히 내가 목사고 수화도 하고, 또 교류를 나누며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오늘과 같이 밀알에 오게 됐다. 지금은 밀알 내부 사역과 농아인 사역을 동시에 하고 있다.
일반인이 설교를 직접 듣는 것과 농아인이 수화를 이해하는 것은 차이가 있을 텐데 어떤 차이점이 있나
결론 먼저 말하면 수화를 다 알아듣기 어렵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이 설교를 해도 그 목사님의 설교 스타일을 따라서 수화로 통역하여 설교를 전달해도 농아인들이 굉장히 복잡하고 헷갈려 하고 이해하기 힘들어 한다.
농아인 교회는 농아인의 방식이 있다. 예를 들어서 집사님이나, 장로님 앞에서, 청년들이나 한인 2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가 각각 다르듯이 농아인의 설교도 달라야 한다. 그래서 본인은 현재 기도하기를 어느 한 교회에서 예배 장소를 허락해서 농아인이 한 명이 모이든, 두명이 모이든 농아인의 모국어인 수화로 농아인 예배를 드리면 좋겠다. 물론 수화를 배우고자 하는 많은 분들이 동참 할 수 있는 일반 교회와 마찬가지이다. 다만 예배 전체가 수화로 구성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보통 일반교회에서 입으로 설교를 하면 표정과 말투와 전체적인 것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데 수화로 하게 되면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이루어 지나
보통 일반교회에서는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두 번 이상 교인들을 웃게 하는데 우리 농아인들은 웃기 어렵다. 건청인(건강한 청력을 가진 사람=일반인)에게 웃기는 얘기가 수화로 받는 농아인은 이해하기가 어려울때가 많다. 그래서 이 유머의 내용을 설명해준다.
그럼 웃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차원밖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농아인들이 웃을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있다. 바로 농아인 예배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일 것이다. 또한 농아인들이 웃을 수 있는 방식의 기쁨이라면 일반인들역시 함께 웃고 기쁨을 나눌 수 있다.
그래서 수화통역으로 전달되는 설교의 내용을 농아인이 70% 이상 이해해주면 고맙다. 가능하다면 설교자가 직접 자기 설교를 자기의 수화로 전달 했을 때 농아인들은 더욱 큰 은혜가 넘칠 것이다. 어쨌든 농아인만 모일 수 있는 예배는 있어야 한다.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농아인들의 독특한 전달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농아인 그들과 수화와 농아인을 사항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가 제공되었으면 좋겠다.
일반적으로 수화로 목회를 하는 건청인 목회자 중 대부분은 말은 하지 않고 수화만 한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말하고 수화하고 같이 연습을 시작해서 음성언어와 수화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내가 10년 넘게 농아인 교회 있었기 때문에 일반교회에서 설교하라고 하면 정말 힘들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일반교회 초청되어서 설교를 해도 손이 자꾸 올라간다. 직업병인 것이다. 그런데 농아인에게는 수천번 설교를 했기 때문에 쉬운 편이다.
본인은 3개월전 뉴욕으로 오기 전에 한국 군산농아인교회에서 11년 반을 담임목회를 하였다. 그 이전에는 서울에바다농아교회, 강릉에바다농아교회, 충남 서천농아인교회(개척), 동해에바다농아교회(개척), 중국 농아인선교 11년을 지속적으로 사역하였다. 그래서 농아인을 위한 수화 설교는 수준급이라고 생각한다.(웃음)
뉴욕밀알선교단에서 뉴욕지역 한국수화보급을 위해 월요일 낮 11시와 밤 8시, 목요일 밤7:30. 이렇게 세 타임을 개설하였다. 아직은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향후 수화를 배우신 분들을 중심으로 수화선교찬양단을 구성할 것이다. 수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표정이다. 두번째로 손이고 세번째가 옴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 수화라는 언어가 전달이 되는 것이다. 직접 수화로 해도 농아인들은 너무 빨라도 안보이고 너무 느려도 안보인다. 수화는 나름대로 농아인의 독특한 문법도 있다.
들리는 언어 같은 경우는 말하는 대로 전달이 되는데, 수화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달이 되는가(조사 은,는,이,가와 같은 언어체계가 있는지)
수화에 조사가 없지는 않지만 조사를 쓰면 농아인은 알아듣기 힘들다. 수화는 동사가 거의 90%이다. 예를 들자면 ‘노래’와 ‘노래하다’가 같은 말이다. 그래서 의사전달에 한계가 많이 있다. 동사가 많은 언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수화 체계는 조사가 미약하고 단어수가 굉장히 적다. 우리 말에 단어수가 1만개 가까이 되는 것에 비해 단어수가 1500개에서 2000개 밖에 안된다.
그러면 의견을 전달할 때 직접 들리는 언어보다 범위가 작을 것 같은데
농아인 방식으로 설교자나, 화자(話者)가 의도하고자 하는 목적의 내용을 수화로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수화가 부족하다고 신앙의 성숙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농아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실제로는 본다라는 표현이 어울릴듯) 은혜를 신앙을 갖고 금식으로 기도하고, 방언(목소리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신앙성숙은 말의 개수에 있지 않고 얼마나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전달되는 언어의 범위가 작을 것이라는 견해는, ‘한글 1개 = 수화 1개’ 라는 공식으로 대입하기 때문이다. 한글이 아닌 ‘수화’로 설교를 하게 되면 필요한 이야기는 거의 다 전달 할 수 있다. 하지만 수화를 다시 한글화(번역) 한다면 혼란스러울 것이다.
보통 농아인이 되는 것이 선천적인 것이 있겠고 후천적인 것이 있겠는데 어떻게 농아인이 되는지
농아인에게 언제부터 안들렸냐고 물으면 90%정도는 3-5살 때 부터라고 말한다. 그러면 태어날 때부터 2-3살까지는 들렸다는 것이다. 보통 어렸을 때 홍역이나 장티푸스를 앓아 청력에 이상이 온다.
본인도 들은 이야기지만 이 장티푸스를 옛말로 염병이라고 했는데, 열병이라고도 한다. 이 열병이 올라오면 온몸에 열이 땀 등등으로 배출될 때 고막에서도 열기가 분출되기 위해 고막이 파열되게 된다.
이 고막은 귀 속에 들어가 있으니 보이지 않는다. 열병이 앓고 나서 병원에 가면 이미 고막이 터진 상태이기 때문에 치료 시기를 놓쳐 청력을 잃게 된다. 그때가 보통 3-5살 사이라고 대답하는 농아인이 아주 많다.
예전에는 이렇게 청력을 상실하는 경우가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예방접종도 많이 하고 의학이 발달해 이런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다. 다른 일부의 농아인들은 후천적 요소에 속한다. 교통사고를 당하다든지 사고로 인해 청력에 심한 무리가 가해지면서 청각장애가 생기기도한다. 또한 심각한 사회 문제(농아인 사회문제)는 노인성 난청이다. 청각언어 장애가 완전한 후천적, 어느정도 선척적이라는 것에 대한 의학적 보고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농아 사역의 필요성이 있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 명령에 의해서 누구를 막론하고 복음을 세계 모든 민족에게 전달을 해야 한다. 한국에서 전세계에 나간 선교사들이 12,000여명이 된다. 전세계 곳곳에 오지까지 들어가서 선교를 할 때에 그 지역이나 동네에 있는 일부의 청각 장애인은 선교사 본인이 해당 언어의 수화를 하지 못한다면 그 농아인들은 복음을 받아 들이기 어렵다고 본다.
예를 들면 뉴욕에서 제일 큰 한인교회 훌륭한 목사님 10분이 은혜충만한 설교를 한꺼번에 한다 한들 수화 통역이나 본인이 수화를 직접 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복음을 받아드릴 수 없다.
본인은 복음을 받는 마지막 족속은 의사소통 장애를 가지고 있는 농아인이라고 확신을 한다. 전세계 어떤 사람, 어떤 장애인도 거의 다 듣는다. 그러나 농아인들은 못듣는다. 아주 훌륭한 설교라 하더라도 수화가 없으면 농아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저보고 이 길을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고 생각한다.
농아인들의 고충이 있다면
농아 가정에 가면 부모와 자녀 농아인과 의사소통이 안되고 농아인과 그 자녀들과의 의사소통이 거의 안된다. 예를 들어 한 가족에 할머니, 할아버지, 농아 부모, 자녀가 교회를 가면 각자 간다. 가족내 농아인은 따로 농아인 교회에 간다. 농아인을 포함한 한 가족을 한 교회에서 해결하기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본인이 사역할 농아인교회 역시 농아인만위한 예배 프로그램 사시사이에 일반인(가족)을 위한 프로그램 구성을 하기 위한 프로그램 인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는 대부분 큰 교회가 사정이 매우 좋은 편인 것은 사실이다. 농아인을 위한 전문인력, 그 가족들도 함께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교회 환경이 필요하다. 이 문제가 참 심각하게 마음에 남는다.
플러싱 어느 커뮤니티에도 농아인들은 단 한명도 들어가 있지 않다. 농아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따로 만들만한 농아인의 구성 숫자마저 부족하기는 해도 자기지역 커뮤니티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농아인은 아직 본적이 없다.
또한 농아인이 포함된 가족 구성원들이 수화를 배우면 좋은데 배우지 않는다. 조선시대 한국 사람들은 집에 장애인이 있으면 극복의 대상,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수치의 대상인 적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그런 경우를 보기는 어렵지만...
이는 농아인이 ‘사회화’가 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농아인만 따로 모아서 그들만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이 사화와 함께 살아 숨 쉴 수 있어야 한다는게 참 어렵다.
독특한 것은 농아인으로 형성된 사회는 마치 국가가 따로 있는 것 같다. 농아인들 안에 대통령급이 있고 국무총리급이 있고 외무부 장관급 등이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외무부 장관 격이다. 농아인이 아니면서 외부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또 이를테면 한국 농아인 협회장이 농아인의 대통령급인 셈이다.
본인이 12년 전, 군산 농아인 교회에 처음 부임했을 때 농아인은 본인의 목회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신뢰하지 않았다. 본인이 건청인이라는 이유로 받아드릴 수 없다는 것일수도 있다. 그 사람들이 본인을 자기 사람이라고 인정할 때까지가 5년이 걸렸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어디에 내놓아도 수화 베테랑이다. 그런데 농아인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과 동화되기 힘들었다. 우리교회에서 농아인 전도사님 한명을 데리고 있던 적이 있었다. 농아인 성도들은 새로 부임한 전도사님이 농아인이라는 이유로 매우 친해졌다. 본인이 거친 힘겨웠던 5년여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은 참 친하게 지냈다.
농아인들은 사회화(커뮤니티에 적극 참여하는 정도)가 되고 사회 일선에 진출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다. 그런 것들이 어려움이라면 어려움이다.
또 다른 어려움은 재정적 어려움을 무시할 수 없다. 농아인들이 의사통 문제로 사업을 할 수도 있는 것은 아니고 사업은 커녕 취업도 너무 힘들다.
농아인 목회자가 따로 있는지
내가 한국에 몸담고 있던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에는 세계 유일의 농아인 지방회인 특수지방회 내 30개 정도의 농아인 교회가 있다. 거기 30명 목회자 중에 나만 건청인이고 다른 선후배 전부 농아인 목회자이다. 전국적으로 한국에 농아인교회 목회자들은 150명 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중 20%가 건청인 목회자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20% 미만이라는 견해가 더 많다.
농아인 사역을 하는 농아인 목회자와 일반 목회자와의 차이가 있다면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발음이 좋은 사람, 안 좋은 사람이 있듯이 수화는 잘하는데 왠지 모르게 농아인이 아니라는 티가 많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발음이라 할 수 있는데 동작, 어휘력에서 많이 차이가 난다. 문장을 통틀어서 한 동작에 나오는 수화가 있는데 수화 한 개로 해결이 될 것을 3번 이상을 해야 비로소 의사소통이 되는 것이다. 이런 분들(통역자) 일수록 수화에 관한 훈련을 더욱 많이 받아야 한다.
농아인이 농아인 사정을 잘 알 수 있어서 일반인보다 설교를 잘할 것 같은데
그래서 농아인이 50점 유리하게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나도 첫 담임 목회지인 군산농아인교회에서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그들과 융화하는데 5년이 걸렸다. 나중에는 군산 농아인들이 나를 너무나 신뢰를 해줘서 그때부터는 목회가 너무 편했다.
굳이 설교만을 말한다면 훌륭한 설교를 통역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수화는 “손가락으로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닌 마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농아인이 더 설교를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크게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모국어(수화)를 쓰는 모국인(농아인)이 더 잘 통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본인은 모국어가 수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했던 농아인 사역 외에 한 다른 사역이 있다면
지난 11년 반 동안 군산 농아인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그때 중국 농아선교 사역을 병행했다. 한국에서 군산농아인교회 뿐만 아니라 인근에 다른 지역에 농아인교회를 한곳을 더 개척해서(사역자가 너무 부족해서 본인이 맡을 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부르심) 농아인 교회 두 곳을 담임하고 오전예배, 오후예배를 드리고 동시에 정식 선교사 인준을 받아 한 두 달에 한 번씩 중국 농아인 선교지에 가서 관리, 양육, 개척, 지원 등을 해 주는 동시 사역을 했다. 본인이 다녀온 중국은 44회이다.
본인이 중국에 지원하고 있는 중국농아인인 수가 2천명 이상이고 중국농아인 교회가 20개가 넘는다. 농아인 지도자는 30여명이고 자체 훈련반이 또 2-30여명이 된다. 그 중 얼마 전에 중국 남경신학교를 농아인으로는 최초로 졸업한 2명의 농아인 사역자가 중국내 최초의 농아인 목사안수를 받았다. 뿌린 열매가 이렇게 커가고 있다.
현재 중국 선교 사역은 남방으로 선교지역을 확대하고 신실한 선교사와 팀을 이뤄 소수민족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본인이 맡은 일은 중국 선교지원을 위한 미국 거주 선교사이다.
중국인은 장애인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는다. 본인이 중국 농아인과 거리에서 수화로 얘기하고 있으면 지나가는 일반인이 바보라고 놀린다. 전체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의식이 굉장히 떨어져 있다. 중국에서의 농아인 선교는 상처받고 소외된 영혼을 향해 뿌려져야 하는 것은 오로지 복음이다.
일반인이 농아인과 교제를 나누면서 주의하고 배려할 점이 있다면
주의해달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배려를 해줬으면 좋겠다. 농아인은 커뮤니케이션 장애이기 때문에 뭐든지 해주는 것보다 무슨 일이든 동참시킬 수 있도록 ‘기회’를 열러줬으면 좋겠다.
이것을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과제는 많은 사람들이 수화를 배워야 한다. 수화를 배우지 않으면 농아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이다. 돈이나 물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친절한 관심을 위해 수화를 배워야 한다.
현재 뉴욕밀알선교단에서 월요일에 오전 11시, 저녁 8시, 목요일에 저녁 7시30분에 한시간반동안 수화를 가르치는데 한달에 20불을 받고 있다. 수업료 20불 안내도 수화를 배울 수 있도록 하는데 돈을 안내면 오지 않는다. 그래서 많이 배우셔서 그들과 교제를 많이 나눔으로 농아인들 삶이 윤택해졌으면 좋겠다.
이번에 2006 할렐루야 뉴욕복음화대회에서 수역 통역을 했던데
뉴욕교협 이재덕 사무총장님께서 요청을 하셨다. 할렐루야 성회 때 본인이 수화하는 모습을 보고 은혜 받았다는 성도들이 굉장히 많았다(웃음). 대회기간 3일 동안 강단 위에서 총 10시간 서 있었다. 뉴욕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농아 사역의 전망이라든지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미국에서 한인들이 두번째로 많다는 뉴욕에 아직 농아인 교회가 없다. 하나님께서 개척을 허락해 주셔서 밀알 선교단과 연결이 되어서 초기 개척 단계에서 이렇게 일하게 된 것이라 생각이 된다.
뉴욕지역의 모든 농아인이(그 숫자가 몇이 되든 상관 없이) ‘자기들의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돕겠다. 이 일을 위해 115파운드인 이 몸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한다.
한국의 농아인 교회 목사들 가운데 40대에서 50대까지 1세대 목회이고 나는 2세대이다. 1세대 선배 농아목사님들이 이뤄놓은 농아인 교회를 2세대가 발전 시켜야 할 텐데 현재 자리에서 안주하는 자체가 너무 힘들고 바쁘다.
지는 11년 반을 군산농아인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나름대로 중견 농아인교회의 면모를 갖추면서(농아인의 숫자는 30명 이내였지만 교회의 역사는 34년이므로) 편하게 목회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편하게 목회 한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어쩌면 본인이 군산농아인교회에서 조금이라도 더 있었으면 그대로 안주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나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은 뉴욕지역 농아이 사역을 제 궤도에 안정시켜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리고 현재 몸담고 있는 밀알선교단 사역에 매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동시에 그토록 오래도록 꿈꿔왔던 세계 농아인선교를 위한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일반 성도들은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뭐가 필요한지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여기까지 보내신줄 확신한다.
아마도 곧 농아인 교회를 시작하고 아울러 수화를 보급을 할 것이다.
일반 교회에서 우리 밀알 선교단과 연합예배를 한번이라도 드려보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게 될 것이라 믿고 있다. 지금까지는 장애인을 생각하면 무조건 줘야 되는 사람, 불쌍하게만 생각했던 사람, 후원금을 줘야만 했던 대상으로 여겨졌다.
가끔 헌금 받아야 하는지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헌금 받아달라고 일부러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장애인 선교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 우리가 어떻게 선교를 해야 하는지 알려드리고 장애인을 통해서 일반 사람들이 받은 은혜라는 것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여러분들의 교회가 밀알 선교단의 장애인을 초청하여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다. 밀알선교단이 일반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회복시키기 위한 초대라고 믿는다. 장애인들과 한번도 예배를 드려본적 없는 교회라면 지금 빨리 이 축복의 통로를 경험하길 소망한다.(아래 밀알선교단 연락처 참조)
개척교회, 큰 교회 상관없이 저녁예배 오후예배에 장애인들이 참석해서 함께 신앙의 교류를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나야 한다. 또한 여기 밀알선교단에 격려 전화 한 통화라도 해주신다면 많은 힘이 많이 될 것 같다. 뉴욕밀알선교단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은혜로운 일들이 많이 있다.
문의 : 뉴욕밀알선교단 718-445-4442, 917-991-0703
© 2020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