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석달치 사글세가 밀린 지하셋방이다
너희들은 햇볕이 잘 드는 전세 집을 얻어 떠나라

아버지는 아침 출근길 보도 위에 누가 버린 낡은 신발 한 짝이다
너희들은 새 구두를 사 신고 언제든지 길을 떠나라

아버지는 페인트칠할 때 쓰던 낡은 때 묻은 목장갑이다
몇 번 빨다가 잃어버리면 아예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포장마차 우동 그릇 옆에 놓인 빈 소주병이다
너희들은 빈 소주병처럼 술집을 나와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아버지는 다시 겨울이 와서 꺼내 입은 외투 속에 언제 넣어두었는지 모르는 동전 몇 닢이다
너희들은 그 동전마저도 가져가 컵라면이라도 사먹어라

아버지는 벽에 걸려 있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 고장 난 벽시계다
너희들은 인생의 시계를 더 이상 고장 내지 말아라

아버지는 동시 상영하는 삼류극장의 낡은 의자다
젊은 애인들이 나누어 씹다가 그 의자에 붙여놓은 추잉껌이다
너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깨끗한 의자가 되어주어라

아버지는 도시 인근 야산의 고사목이다
봄이 오지 않으면 나를 베어 화톳불을 지펴서 몸을 녹여라

아버지는 길바닥에 버려진 붉은 단팥이 터져 나온 붕어빵의 눈물이다
너희들은 눈물의 고마움에 대하여 고마워할 줄 알아라

아버지는 지하철을 떠도는 먼지다
이 열차의 종착역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짐을 챙겨 너희들의 집으로 가라

아버지는 이제 약속할 수 없는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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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시인 정호승 님이 지으신 “아버지들”이란 시입니다. 아버지주일을 맞이하면서 아버지에 관한 시를 나누고 싶어서 여러 시집과 시 관련 사이트를 찾았는데 “아버지”를 제목으로 한 좋은 시가 별로 없었습니다. 특히 우리가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소위 인기 시인들 중에는 아버지에 관해 쓴 시들이 거의 없다는데 좀 놀랐고 그리고 몇 편의 발표된 아버지에 관한 시들도 그 내용이 대부분 아버지에 관한 부정적이고 암울하고 폐쇄적인 표현들인 것을 보면서 마음이 좀 그랬습니다.

사실 아버지에 관해 그렇게 표현하는데는 아마도 각자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지만 아버지들에 대한 표현이 그런것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아버지들이 살았던 시대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둠고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와 책임을 모두 도맡아 지고 시대의 중심에 서서 살아온 아버지들이기에 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그분들 속에 담겨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호승 님의 시에서도 나타나듯이 우리 아버지들이 살아온 시대는 사글세 지하셋방에 살며 그 사글세를 제때에 내지 못하고 몇 달치씩 밀리며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는 길에 버려진 낡은 신발처럼 너절하게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는 추운 겨울 외투 주머니에 몇푼의 동전만 달랑거리게 가난한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는 낡은 의자에 앉아 자주 끊기는 영화를 본 삼류극장시대였습니다. 그리고 한번 씹은 껌을 단물만 빼먹고 버리는 지금과 달리 씹다가 다시 붙여놓고 다시 떼어 씹던 바로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산 시대의 한복판에 우리 아버지들이 있었고, 그래서 아버지들은 그렇게 사는 책임을 고스란히 지고 살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허접스럽고 어둡고 가난에 쪄들어 살았지만 그 시대 아버지들은 자녀들을 향해 바르게 살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사글세도 밀리며 지하셋방에 살면서도 그 시대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향해 꿈을 꾸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당장 버려도 아까울 것이 없는 낡은 신발을 신고 살았지만 그 시대 아버지들은 자식들에게 기죽지 말라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비록 바지 주머니에 동전 몇닢밖에 없이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 시대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향해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 우리는 그 시대의 아버지들에 비해 넓은 집에서 살고 멋진 신발을 신고 한층 여유롭게 살아가게 되었는데도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자식들에게 바르게 살라고 큰 소리를 치지 못합니다. 꿈을 꾸라고 소리를 높이지 못합니다. 자식들의 잘못에 회초리를 들지 못하고 호통을 치지 못합니다.

아버지주일을 맞이하며 어렵고 힘든 시대, 암울하고 가난한 시대에 살면서 그래도 자식들을 향해 꿈을 심어주고 큰 소리를 치며 회초리를 들고 호통을 치던 아버지들이 그립고 그런 아버지들이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