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미국 여성 대통령을 노리는 힐러리 클린턴 의원이 최근 안나 윈투어(Anna Wintour)에게 단단히 혼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미국 패션지‘보그’의 표지모델로 나와 달라는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요청을 힐러리 의원이 거절한 것입니다. 대통령후보로 출마한 힐러리 의원에게 측근들이 “패션지 모델로 나서면 지나치게 여성적으로 보여 선거에 지장 받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핵폭탄’이라는 별명을 가진 윈투어는 곧바로 반격을 날렸습니다. 윈투어는 2월호 편집장 글에서 “여기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니고 미국이다.”“남성적인 정장을 입어야 힘이 있어 보이던 것은 20년 전 얘기”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현재 패션에 관한한 그 누구도 미국 보그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의 말에 토를 달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어떤 디자이너든 모델이든 사진가든 미국 보그에 한번이라도 등장해야 비로서 성공했다고 평가되는 시대상황이 그 이유입니다. 만일 그녀의 눈 밖에 나면 가차 없이 패션계에서 소외되기 때문입니다.

안나윈투어는 소설 또는 영화로도 성공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패션계를 좌지우지하며 유명인사와 패션관계 인물들을 휘두르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한 일입니다. 그녀의 지휘로 제작되는 보그는‘세계를 지배하는 미디어 브랜드’라는 책에서 CNN, 뉴욕타임스, 내셔널지오그래픽 등과 함께 최고의 미디어로 뽑혔습니다. 제자인 마크 턴게이트는 윈투어를 이렇게 정의 합니다. “오늘날 윈투어는 그녀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서 선망과 시기를 한 몸에 받는다.” 패션잡지 하나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된 혁혁한 공로를 따지고 들어가 보면 그 배후에 안나 윈투어가 20년간 있었던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그녀의 부친은‘이브닝 스탠더드’지의 에디터를 지냈으며, 외할아버지는 하버드법대 교수였습니다. 일찌감치 패션에 눈뜬 윈투어는 16세 때 대학대신 패션지 어시스던트 자리를 택했습니다. 과감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남다른 안목을 인정받아 미국 보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영국 보그 편집장을 거쳐 1988년 미국 보그 편집장으로 전격 승진하게 됩니다. 보그를 통해 그녀는 당대 유행을 가장 현실적이고 영향력 있게 제시했습니다. 그녀 밑에서 일하다 미국 판‘하퍼스 바자’편집장으로 스카우트돼 윈투어와 라이벌이 된 리즈 틸버리스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안나는 패션계의 변화를 잡지를 통해 이끌어낸 극히 드문 케이스다. 1960년대 이후 미니스커트가 재상륙한 것도 윈투어의 눈썰미였다. 세계 모든 사람의 치마길이를 올리고 내리는 인물이 윈투어라는 얘기입니다.

그녀의 힘은 패션 비즈니스 세계를 쥐고 흔듭니다. ‘런던-밀라노-파리-뉴욕’순서였던 세계 패션 위크 스케줄을 바꿔 뉴욕을 맨 앞으로 뺀것도 윈투어였습니다. 한동안 컬러선택과 소재개발, 제작과 판매시스템에 혼란이 일어나 세계패션계가 진통을 겪었지만 누구하나 반항하지 못했습니다. 2004년 타임지 선정 패션계 파워 10명에 기록된 그녀를 타임지는 “유행은 그녀의 충고 하나로 탄생되기도 하고 무력해 지기도 한다. 차가운 사람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풋내기 디자이너들을 키우는데 헌신해왔다.”고 평가합니다.

그녀는 현재 패션계의 슈퍼스타 존갈리아노(크리스찬 디올)를 발굴하여 재정적로 결정적으로 후원했고, 최근 승승장구하는 마크 제이콥스도 윈투어의 지원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파산 직전의 디자이너, 많은 신인들을 위해 패션 펀드를 마련하고 저개발 국가의 여성들의 일자리를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입시출세에 머물지 않고 모든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는 그녀의 모습은 패션계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것이 지나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에 제한되지 않는 전세계를 향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분야에서의 정상에 도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복음의 영향력을 전세계에 끼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