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우리 교회 부흥회 마지막 시간, 강사님은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섬기던 주밀한 배려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시었습니다. 그 날 이후, 저는 ‘ 배려’ 라는 단어에 대하여 묵상하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배려’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세심하게 마음을 씀” 인데, 이 단어는 한국어에만 있는 아름다운 단어인 것 같습니다. 영어로 번역해보고자 시도해보았으나 배려가 의미하는 그 자상하고 세심하며 센스 있게 보살피는 뉴앙스가 정확하게 표현된 영문 단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배려는 피곤하고 삭막한 이 세상에서 따끈한 한 잔의 차처럼 인생을 포근하게 합니다. 누군가에게 배려받고 있다는 사실은 지친 영혼에 여유와 용기와 쉼을 줍니다. 그래서 인생이 살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대머리라고 놀림 받았던 선지자 엘리사는 격노하여 숲에서 암콤 둘이 나오게 하여 자신을 놀린 아이들 40명을 저주하며 찢게 합니다. 엘리사의 거친 면모를 보게 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수넴여인이라는 경건한 여인이 그에게 베푼 주밀한 배려에 큰 감동을 받고, 아이가 없던 그 여인으로 하여금 잉태게 합니다. 과연 우리의 배려는 아무리 거친 사람의 마음이라도 부드럽게 바꾸어줍니다.

쉼이 없이 달려온 지난 10년의 목회였습니다. 고단하다면 고단한 세월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목회가 행복하게 추억될 수 있는 것은 많은 성도님들의 주밀한 배려덕분이었음을 이제사 깨닫습니다. 지난 주 어느 날 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베풀어주신 그 수많은 배려들이 생각나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일일이 그 배려들을 다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저 연약한 종을 보살피고 도우려 애쓰시는 그 세심한 관심과 섬김들을 통하여 저는 주저 앉았다가도 또 일어나 전진할 수 있는 힘을 얻었음을 고백합니다. 이 글을 쓰기 직전에도, 저의 몸이 불편하다는 소식을 듣고 몇몇 성도님들이 곧바로 달려와 기도하고, 주무르고, 결국 가까운 한 의원으로 데려가 침을 맞게 한 후, 이렇게 앉아 컴퓨터라도 두드릴 수 있게 해 놓고는 돌아들 가셨습니다.

“ 수넴여인의 주밀한 배려에 감동받았던 엘리사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저는 그 날 밤, 수넴 여인을 축복하던 엘리사의 마음으로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의 배려들을 기억하며, 일일이 간절한 축복기도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 하나님이 이런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 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눈물 범벅이 되어 그들을 위한 기도를 주님께 올려드렸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베푸는 모든 자상한 배려들은 사실상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배려이겠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배려의 하나님이십니다. 요즈음 창세기를 공부하며 저는 배려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느낌입니다. 특히 에덴동산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그 주밀하신 배려가 느껴져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이 땅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황홀해 하는데 타락 전 에덴동산은 얼마나 더 황홀하게 아름다웠을까요? 상상을 초월한 아름다움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완벽한 환경을 창조하셨고, 오직 인간이 하나님 지으신 모든 것을 기쁨으로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만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외로움을 아시고 아름다운 하와까지 만들어주셨지요. 주밀하신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어떻게 하면 아담이 기뻐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것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사인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세심하게 마음을 쓰시며 그의 영혼과 육체를 돌보시었습니다.

해야 될 일도 많고, 풀어야 할 숙제들은 여전히 제 앞에 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주밀하게 배려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그저 그 분을 신뢰하며 즐겁게 살고자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배려로 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한다면 우리 모두의 삶에서 에덴의 기쁨이 조금은 더 회복되지 않을 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