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노트 | 크리스틴 송, 「Breathing Space - 숨 쉴 수 있는 공간 」
완벽한 부모가 없는 자리에서, 완전한 사랑을 만나다
누구나 마음 안에 크고 작은 상처를 품고 살아간다. 그 상처는 부모에게서 오기도 하고, 가장 가까웠던 사람에게서 오기도 한다. 사랑받고 싶었던 만큼 아픔은 깊어지고, 우리는 그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하기 위해 여러 도움을 찾는다.
오늘날 인간의 상처와 관계의 문제는 심리학, 교육학, 의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을 통해 연구되고 있으며, 이러한 접근은 우리가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고 보다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분명 중요한 도움을 준다.
그러나 《완벽한 부모는 없다》를 읽으며 나는 이러한 도움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조금 더 근원적인 질문 앞에 머물게 되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 영혼에 남은 상처까지 회복시키는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책이 내게 특별했던 이유는 부모와 자녀의 문제를 단순히 양육의 기술이나 심리적인 해결 방법만으로 바라보지 않고, 성경에 근거하여 인간의 불완전함과 회복을 이야기한다는 점이었다.
세상에는 완벽한 부모도, 완벽한 자녀도 없다.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람이 아니기에 서로 사랑하면서도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을 넘어서는 완전한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에게서 시작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사랑이다.
〈Breathing Space〉는 바로 그 사랑이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머물 때 시작되는 회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작품의 몸체에는 커다란 투조의 공간이 열려 있다. 처음 바라보면 무엇인가 떨어져 나간 상처처럼 보이기도 하고, 보호되어야 할 내부가 그대로 드러난 듯한 불안한 공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열린 공간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하나의 항아리를 연상시키는 형상이 나타난다.
나는 이 안과 밖의 두 형상을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바라보았다.
부모의 삶 안에는 자녀가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의 자녀 역시 언젠가 누군가의 부모가 될 수 있다. 지금 부모인 사람도 한때는 누군가의 자녀였다. 그렇게 사랑과 기억, 때로는 상처까지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따라서 작품 속 두 항아리는 어느 하나를 부모, 다른 하나를 자녀라고 고정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녀를 품고 있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고, 한 사람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자녀였던 나'로 볼 수도 있으며, 자녀 안에서 앞으로 태어날 미래의 부모를 발견할 수도 있다.
부모 안에 자녀가 있고, 자녀 안에 미래의 부모가 있다.
이렇게 서로 겹쳐지는 형상을 통해 나는 부모와 자녀가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소유할 수 없는 독립된 존재인가를 표현하고 싶었다.
자녀는 나에게서 태어났지만 궁극적으로 나에게 속한 존재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내게 맡겨주신 한 사람의 생명이라고 생각할 때, 부모는 아이의 삶을 움켜쥐고 통제하기보다 하나님께 맡길 수 있게 된다.
그때 자녀에게도 숨 쉴 공간이 생기고, 부모에게도 숨 쉴 공간이 생긴다.
그래서 작품의 커다란 열린 부분은 단순한 상처나 결핍이 아니다. 서로를 놓아줄 수 있는 공간이며,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공간이고, 결국 **다시 숨을 쉬기 위한 공간, 'Breathing Space'이다.
작품의 내부에는 수많은 스크래치와 거친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들은 우리가 살아오며 마음속에 축적한 상처와 기억의 흔적을 의미한다.
나는 그것들을 없애거나 아름답게 가리려 하지 않았다. 회복이란 과거에 아무런 상처도 없었던 사람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존재함에도 그것이 더 이상 나의 존재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처의 중심에는 피라미드가 자리한다.
피라미드는 나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조형 언어 가운데 하나이며, 희생과 사랑,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앙을 상징한다. 이 작품에서 피라미드는 상처의 흔적 한가운데 자리한 사랑의 상징이다.
상처가 사라져야 하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존재하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머물 때 회복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내면에 온전히 자리할 때 과거의 아픔과 관계 속에서 경험한 슬픔은 더 이상 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마지막 말이 되지 못한다. 상처는 남아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다시 숨 쉬고, 다시 살아가며, 새로운 사람으로 일어설 수 있다.
작품의 목 부분에는 이전 작업에서도 반복적으로 사용해 온 '지퍼의 화석(Fossil of Zipper)'이 자리한다.
나에게 지퍼는 열림과 닫힘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물이다. 닫혀 있던 것을 열어 길을 만드는 지퍼는 약 2천 년 전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께서 이미 열어주신 길을 상징한다. 그것이 '화석'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래전에 일어난 십자가의 사건이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 속에도 여전히 흔적과 힘을 남기고 있음을 의미한다.
작품 표면의 유약 역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하나의 조형 언어로 사용하였다.
나는 메이크업에서 얼굴의 특정 부분에 빛을 더해 강조하는 '하이라이트(highlight)'처럼,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선택적으로 투명 유약을 사용했다. 피라미드와 지퍼 화석, 그리고 투조된 공간의 가장자리에 빛을 더했다.
모든 표면을 똑같이 빛나게 하지 않고 특정 부분에만 빛을 남긴 이유는 분명하다.
회복은 상처를 지워버리는 일이 아니라, 상처가 있는 삶 위에 새로운 빛이 더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 표면에 반복되는 십자가와 같은 흔적에는 나의 패션디자인 배경이 담겨 있다.
나는 트위드 직물의 조직을 바라볼 때마다 실들이 서로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반복적인 십자가의 형상을 발견한다. 특히 양털에서 시작된 실로 만들어지는 트위드는 내게 또 다른 신앙적 이미지를 불러온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하신 '어린양'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세라믹의 표면은 직물이 되고, 직물의 조직은 다시 십자가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패션과 세라믹, 그리고 신앙은 내 작업 안에서 서로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조형 언어가 된다.
작업을 하던 중 누군가 내게 이 작품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폴 트립의 《완벽한 부모는 없다》를 읽고 시작한 작업이며, 우리가 부모와 자녀를 비롯한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상처와 그 상처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작품이라고 짧게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듣던 그 사람의 눈에 순간 눈물이 맺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짧은 순간은 오히려 나에게 깊은 울림으로 남았다.
예술이 누군가의 과거를 바꾸거나 상처 자체를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작품이 누군가의 마음 깊은 곳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아픔과 만나고, 그곳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잠시라도 바라보게 할 수 있다면, 예술 역시 보이지 않는 사랑을 전달하는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경험은 내가 왜 계속 작품을 만드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지금까지 나의 작업에는 피라미드와 지퍼 화석, 스크래치와 투조, 그리고 트위드에서 출발한 십자가의 흔적과 같은 조형 언어들이 반복해서 등장해 왔다.
그러나 나에게 '반복'은 같은 형태를 되풀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작품이 달라질 때마다 같은 조형 언어는 새로운 문장 안에서 다른 의미를 갖는다. 어떤 작품에서 지퍼는 닫힌 것을 여는 길이 되고, 어떤 작품에서 피라미드는 희생과 사랑의 기억이 되며, 이번 작품에서 스크래치와 열린 공간은 상처받은 인간의 내면과 그곳에 다시 찾아오는 회복의 자리가 된다.
나는 패션에서 시작해 세라믹으로 작업의 영역을 확장해 왔지만, 두 영역을 서로 다른 세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직물의 조직은 세라믹의 표면이 되고, 패션에서 사용하던 강조와 반복은 유약과 형태, 공간의 언어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이 모든 조형 언어는 결국 내가 예술을 통해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하나의 질문을 향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 수 있을까.
나에게 예술은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을 설명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믿음과 상처, 기다림과 회복을 흙의 표면에 남기고, 때로는 비워내고, 때로는 빛나게 하면서 보이지 않는 복음의 의미를 물질과 공간의 언어로 번역해 가는 과정에 가깝다.
그래서 피라미드와 지퍼, 스크래치와 십자가, 그리고 열린 공간은 더 이상 각각의 장식이 아니다. 작품과 작품을 이어가는 나의 시각적 문장이며, 내가 계속해서 써 내려가고 싶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앞으로도 인간의 연약함을 감추기보다 그대로 바라보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 연약함의 가장 깊은 곳에서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다.
작품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 남아 있는 스크래치를 발견하더라도 그 상처만을 바라보는 데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상처의 한가운데에도 사랑이 자리할 수 있고,닫힌 관계에도 다시 열리는 길이 있으며,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도하나님 안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도, 자녀도,그리고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도그 사랑 안에서 다시 숨을 쉴 수 있다.
그 숨이 다시 시작되는 공간,그곳이 내가 말하고 싶은〈Breathing Space〉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