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아신대학교)
(Photo : ) 신성욱 교수(아신대학교)

[1] 오늘 아침 9시 반, 제자 목사 차를 타고 호텔에서 출발했다가 밤 11시 40분, 늦은 시각에 호텔로 돌아왔다. 기나긴 하루였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은혜롭고 감동적인 하루였다. 전남 지역 기독교 성지 가이드인 제자 목사가 세 군데를 탐방시켜 주었다. 한 곳은 고아원이고, 다른 두 곳은 순교의 스토리가 있는 곳이었다. 세 장소 모두 스토리가 많고 감동이 깊어 한 번에 다 소개하기 힘들다.

[2] 외국에서나 들어보았을 법한 감동적인 스토리가 목포와 주변 지역에도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맨 먼저 방문한 곳은 ‘윤치호와 윤학자 부부’가 고아들을 돌보고 섬긴 목포 ‘공생원’이었다. 남편인 한국인 윤치호 전도사와 일본 여성으로서 남편 성을 따서 한국 이름을 사용하면서 고아들을 아낌없이 사랑한 윤학자 여사 부부의 스토리를 들으니 '한국판 조지 뮬러'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3] 뮬러의 얘기보다 더 감동적인 스토리가 많음에도 기독교계에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남편 윤치호 전도사야 한국 사람이지만, 일본에 홀로 계신 모친의 간곡한 권고까지 뿌리치고 한국 고아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일본인 부인 윤학자 여사의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였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 고아가 죽으면 손수 염을 한 후 천국 가는 아이를 위해 시신과 함께 하루를 같이 잤던 분이셨다.

[4] 1968년 10월 31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가 돌본 고아들은 3천여 명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한국 고아의 어머니’라 불리던 윤학자 여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목포가 울었다"고 한다.
다음 방문한 곳은 증도에 있는 ‘문준경 전도사님 기념관’이었다. 수년 전, 한 번 와본 적이 있지만 그땐 가이드 없이 방문하다 보니 상세하고 정확한 얘기를 듣지 못했다. 결혼했으나 남편이 난봉꾼이었고, 문 전도사님은 인물이 좋지 않아서 소박맞은 것으로 알려져왔다.

[5] 하지만 가이드의 설명과 증언에 의하면 얼굴이 고왔고 남편과도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후손이 귀한 가문에 시집을 갔으나, 10년간 아이가 생기지 않자 대를 이어주기 위해 남편을 설득해 소실을 정해서 아이를 갖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 소실의 아이를 자기 자녀처럼 사랑하고 이뻐해 주었다고 하는데, 이해가 가질 않을 정도로 사랑과 인자가 많은 분이셨다. 그분의 무덤을 처음 방문했는데, 그분이 피흘리고 순교 당한 바닷가 해변 현장이 바로 앞에 있었다.

[6] 공산당이 해할 수 있으니 가지 말라던 이성봉 목사님의 만류를 뿌리친 채 성도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기어코 교회로 갔다가 잡혀서 순교를 했다. 그 교회도 처음 방문했다. 그 밖에 그분이 처음 다녔던 교회도 들러서 그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 못지않게 위대한 순교자임에도 그분들보다 늦게 알려지신 분이다. 한국 교회의 거목 몇 분이 그분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제 대부분이 잘 알고 있는 바다.

[7] ‘이만신 목사님’, 정태기 박사님‘, ’김준곤 목사님‘이 바로 그분들이다.
오늘 제자로부터 문준경 전도사님 외에 또 다른 순교자 한 분에 관한 얘기를 듣고 너무도 큰 감동을 받았다. 그분은 ‘이판일 장로님’이시다. 문 전도사님이 건네준 성경을 읽은 후 그렇게 즐기던 술 담배와 주술 신앙을 버리고 바로 신자가 되신 분이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그분이 살고 있던 ‘임자도’ 역시 공산군의 영향 아래 들어갔다.

[8] 이때 이판일 장로님에게는 피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피난하지 않았다. 결국 1950년 10월, 교인들이 이판일 장로님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때 공산주의자들이 들이닥쳐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은 나오라!”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선택을 요구했다고 한다.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은 나오라. 그러면 살려주겠다.”

[9]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이판일 장로 부부와 자녀들과 동생 부부와 자녀들과 모친까지 모두 12명의 가족이 3km 떨어진 곳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가족 모두가 죽창에 찔리고 몽둥이와 삽에 맞아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 장로님의 큰아들과 딸들은 출가를 해서 다른 지역에 살고 있어서 죽음을 모면했고, 막내딸은 친구 집에 가는 바람에 역시 죽지 않았다고 한다.

[10] 그 막내가 집에 돌아가니 아무도 없어서 “엄마, 엄마!”를 외치고 다니다가 일가족을 살해한 공산당에게 잡혀서 입을 찢긴 채 바다에 던짐을 당해 시신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두 13명의 일가족이 순교 당했다. 훗날 살해에 가담했던 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어린아이까지 누구 하나 살려달라 애걸복걸하지 않고 당당히 기도 중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 13명 가족 외에 교인 35명이 더 살해당해서 한 교회에서 48인의 순교자가 생기게 되었다.

[11] 부모 형제의 소식이 궁금했던 장남 이인재는 군인들과 함께 섬으로 들어갔다가 살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시 살해에 가담한 좌익들을 붙잡은 대장이 생사여탈권을 줄 테니 군인들 대신 총으로 범인들을 쏴 죽이는 기회를 주었다. 분노에 가득 찬 장남 이인재가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순간 하늘에서 ‘아버지의 영음’이 들렸다고 한다. “내가 용서한 사람들을 네가 어찌 죽이려 하느냐? 너도 용서하거라!”는 소리였다.

[12] 그래서 그들을 용서해 주고 또 다른 좌익 공산당들에게도 군인들을 만나도 살 수 있는 면죄부를 하나씩 나눠줘서 살려줬다고 한다. 물론 조건이 하나 있는데, 예수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 재산을 팔아서 그들을 위한 교회를 지었는데, 사역자가 없자 본인이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인재 목사님의 아들 역시 목사가 되어 48인의 순교자를 낸 임자 진리교회의 담임이 되었다.

[13] 오늘 증도에서 임자도를 방문한 우리 일행은 임자 진리교회 담임이자 순교한 이판일 장로님의 손자요 그 장남 이인재 목사님의 아들인 ‘이선균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나와는 동갑이었다. 그분의 간증을 직접 들으면서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분의 차를 타고 13인이 살해당한 현장을 밤중에 방문했고, 자기 부친이 개척해서 목회했던 또 다른 교회인 ‘대기리교회 반쪽 예배당’도 방문해서 담임 목사님과 환담을 나눌 수 있었다.

[14] 오늘은 어느 때보다 기쁘고 행복한 날이다. 한국의 조지 뮬러 ‘윤치호 전도사님과 윤학자 부부’의 얘기도 알게 되고, 평소 익히 알던 ‘문준경 전도사님’에 관한 새로운 얘기도 듣게 되고, 무엇보다 스데반처럼 순교하길 원하셨던 한국판 스데반 ‘이판일 장로님’과, 원수 같은 좌익 공산당들을 용서하신 그분의 장남 ‘이인재 목사님’의 얘기도 처음 확인하게 되면서, 그분의 아들 이선균 목사님을 만나서 순교의 현장까지 방문하게 되니 받은 은혜와 감동이 정말 크다.

[15] ‘재림’이나 ‘순교’라는 용어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는 나에게, 신앙의 선진들처럼 순교자의 일사각오 신앙으로 더욱 확실하게 무장해야겠다는 도전을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