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는데 객차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상하리만큼 조용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 같으면 사람들의 대화 소리도 들리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도 흘러나왔을 텐데, 그날의 지하철은 거의 침묵에 가까운 정적만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은 조용히 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 자기만의 세계 속에 들어가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짧은 영상을 넘기고 있었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은 채 무언가를 듣고 있었으며, 또 누군가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같은 공간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지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조용했지만 결코 조용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침묵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까. 잠시라도 멍하니 있는 시간을 참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계속 보고 듣고 있어야만 안심하는 시대가 되었다. 현대인은 늘 무언가에 접속되어 있다. 운전을 하면서도 무언가를 틀어놓고, 식사를 하면서도 영상을 보며, 잠들기 직전까지 화면을 넘긴다. 짧고 강한 자극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제 긴 문장과 조용한 시간을 힘들어한다. 기다림도 어려워하고 멈춤도 어려워한다. 어쩌면 우리는 침묵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일을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침묵 속에서는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던 불안과 공허함이 들리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그의 저서 『세속 시대』에서 현대 사회를 설명하면서, 오늘날은 하나님이 사라진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린 시대라고 말한다. 과거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 것조차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진 시대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말할 수는 있지만, 실제 삶은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굴러간다고 느낀다. 하나님은 삶 전체를 규정하는 절대적 현실이 아니라 필요할 때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처럼 밀려난다.
여기서 찰스 테일러의 통찰을 오늘 우리의 삶에 연결해 보면 흥미로운 점이 보인다. 현대의 디지털 환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이라는 궁극적인 현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바쁘고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영상과 음악, 뉴스와 정보들은 우리의 시선을 계속 바깥으로 분산시킨다. 그렇게 내면이 소음으로 가득 차게 되면 사람은 조용히 하나님 앞에 서야 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은 삶 전체를 이끄시는 분이라기보다 필요할 때 잠시 찾는 종교적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밀려나게 된다.
생각해보면 누가복음 1장이 시작되는 시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말라기 이후 약 400년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더 이상 선지자의 외침은 들리지 않았고, 로마의 압제 아래 살아가는 현실은 점점 더 버거워지고 있었다. 물론 성전은 여전히 존재했고 제사도 계속 드려지고 있었다. 종교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정말 지금도 일하고 계신가에 대한 기대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완전히 부정되지 않았지만 삶의 중심에서는 멀어지고 있었다. 신앙은 남아 있었지만 살아 있는 기대는 사라져가고 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헬레니즘 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하나님보다 다른 즐거움과 욕망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외경인 마카베오서에는 제사장들조차 성전 직무보다 경기장과 스포츠에 더 열중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하나님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많아지고, 하나님보다 더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것들이 넘쳐나던 시대였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도 사람들은 말씀보다 더 강한 자극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하나님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 이상 삶의 중심은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바로 그런 시대 속에서 일하고 계셨다.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계셨다. 누가는 이 구속사의 시작을 화려한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한 늙은 제사장 부부의 삶 속에서 보여준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었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도하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 깨지는 순간, 사가랴의 침묵이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아들의 탄생을 약속했지만 사가랴는 그것을 믿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경험과 현실이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이 든 몸과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 약속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였다. 어쩌면 이것 역시 세속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인지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눈앞의 현실과 계산을 더 신뢰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가랴를 침묵하게 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징계만은 아니었다. 하나님을 다시 듣게 되는 시간이었다. 사가랴는 긴 침묵 속에서 자기 생각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붙드는 법을 배우게 된다. 자기 안의 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더 분명하게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침묵이 끝났을 때 그의 입에서는 원망이 아니라 찬양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너무 많은 소리 속에 살아간다. 너무 많은 정보와 뉴스와 영상과 반응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침묵 속에서 가장 깊은 일을 이루신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광야의 긴 시간 속에서도 일하셨고, 말라기 이후의 침묵 속에서도 일하셨으며, 십자가의 어두운 침묵 속에서도 구원의 일을 이루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억울함과 조롱 가운데 자신의 입을 열지 않으셨다. 그 침묵은 무기력한 체념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신뢰의 침묵이었다.
어쩌면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와 더 큰 소리가 아니라,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조용해지는 일인지 모른다. 세속 시대는 끊임없이 우리를 분주하게 만들고 더 빨리 반응하며 더 많이 말하라고 재촉한다. 그러나 제자는 먼저 듣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원고의 내용은 전적으로 저자의 것입니다.
홍승민 교수는 센트럴신학대학원 신약학 학과장 (겸임)으로서 필라델피아 근교 브니엘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