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5월 25일, 바티칸 시노드 홀에서 전례 없는 문서 하나가 발표되었다. 교황 레오 14세는 이례적으로 직접 연단에 서서 AI 시대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인간 존엄성 수호를 위한 ‘AI 무장해제’를 전 세계에 선포했다. 그가 서명한 첫 번째 회칙 『마니피카 휴마니타스』(Magnifica humanitas)—‘위대한 인류’라는 뜻의 라틴어 제목을 단 이 문서는, 2천 년 가톨릭 교회 역사상 인공지능을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교황 회칙이다. 회칙은 AI의 급격한 발전이 인간의 존엄성, 노동, 관계, 그리고 진리 인식 자체를 어떻게 재편하고 있는지를 신학적 언어로 묻는다.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들이 인간의 지성을 코드로 증류하려 할 때, 교회는 2천 년 묵은 양피지를 꺼내 그 코드가 담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기 시작했다.
개신교 신약학자로서, 나는 이 문서를 읽으며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하나는 경외감이었다. 가톨릭 교회가 이 시대의 가장 긴박한 질문 앞에 신학의 언어로 응답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오늘날 많은 개신교 교회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과 선명하게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물음이었다. 이 위대한 선언이 정작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회칙이 서 있는 자리
『마니피카 휴마니타스』는 갑자기 등장한 문서가 아니다. 교황청은 이미 2020년 『AI 윤리에 관한 로마 콜』(Rome Call for AI Ethics, 2020)에서 AI 개발의 여섯 가지 윤리 원칙—투명성, 포용성, 책임성, 공정성, 신뢰성, 보안—을 제시한 바 있다. 2023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인공지능과 평화’를 주제로 한 메시지를 발표하며, AI가 인간의 자유와 공동선을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레오 14세의 회칙은 이 흐름의 정점이자 도약이다. 단순한 윤리 지침의 나열을 넘어, AI 문명 전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제목 『마니피카 휴마니타스』는 마리아의 찬가 『마그니피카트』(Magnificat, 눅 1:46-55)를 의도적으로 연상시키는 듯하다. 하나님께서 낮은 자를 높이시고, 강한 자를 그 자리에서 내리신다는 그 노래—그것이 AI 시대의 인간 존엄성을 이야기하는 회칙의 신학적 뿌리로 자리한다.
회칙의 핵심 주장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AI는 인간의 도구이지 인간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이며, 이 존엄성은 생산성이나 효율성으로 환산될 수 없다. 알고리즘이 아무리 정교해도,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 양심, 그리고 타자를 향한 사랑의 능력을 모사할 수 없다.
바울의 몸 신학이 건네는 대화
이 지점에서 나는 신약학자로서 바울의 ‘소마’(몸) 신학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싶다. 바울에게 ‘몸’은 단순한 생물학적 육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 타자와 연결되는 통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바울의 이 선언은 단지 성적 윤리에 대한 교훈이 아니다. 인간의 몸이 신성한 임재의 장소라는, 급진적인 존재론적 선언이다. 말하자면 몸은 하나님이 세상에 집을 구하신 첫 번째 주소지이며, 그 집은 어떤 클라우드 서버에도 이전될 수 없다. AI가 제기하는 가장 심층적인 위협은 여기서 시작된다. AI는 인간의 ‘몸 없는 지성’을 모방한다. 그것은 데이터를 처리하고, 패턴을 인식하고, 언어를 생성한다—그러나 그것은 아프지 않고, 굶주리지 않으며, 타자의 고통 앞에서 가슴이 저려오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 바울이 말하는 ‘소마’의 신학은 바로 이 ‘몸의 취약성’이 인간 존재의 결함이 아니라 핵심임을 가르친다.
더 나아가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의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이 공동체론은 AI 시대에 전혀 새로운 긴박성을 얻는다. AI가 인간의 관계를 매개하고, 공동체의 언어를 생성하고, 심지어 목회적 돌봄의 영역에까지 침투하기 시작할 때, ‘몸의 공동체’라는 바울의 비전은 저항의 언어가 된다. 알고리즘으로 연결된 네트워크가 아니라, 서로의 약함을 짊어지는 몸들의 공동체—이것이 교회가 AI 시대에 지켜야 할 고유한 정체성이다. AI가 인간을 정보의 노드(node, 데이터망의 한 접속점)로 다룰 때, 교회는 그 노드들이 사실은 상처를 기억하는 살아 있는 몸임을 고백하는 공동체다.
『마니피카 휴마니타스』가 ‘하나님의 형상’을 중심으로 인간 존엄성을 논한다면, 바울의 ‘소마’ 신학은 그것을 더 구체적이고 관계적인 차원으로 육화한다. 존엄성은 추상적 선언이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들이 서로를 돌보는 구체적 실천 안에서 살아난다.
그러나 이 신학적 대화가 깊어질수록, 역설적으로 회칙 자체의 공백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바울의 ‘소마’ 신학이 요구하는 구체성과 관계성의 기준으로 볼 때, 『마니피카 휴마니타스』는 아직 충분히 ‘몸’이 되지 못한 문서다. 이 물음들을 직접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회칙이 놓치고 있는 것들
그러나 이 회칙의 역사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몇 가지 중요한 공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남반구의 몸’이 빠져 있다.
AI 기술의 발전은 지구적 현상이지만, 그 혜택과 피해는 결코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저소득 국가들에서 AI는 이미 노동 시장을 교란하고, 디지털 식민지 구조를 심화시키고 있다. 가나와 케냐에서는 AI 자동화의 확산과 함께 콜센터와 데이터 입력 일자리가 압박을 받고 있으며, 그 대신 빅테크 기업이 저임금으로 고용하는 AI 학습 데이터 라벨러들의 노동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보고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들의 노동은 북반구의 AI 시스템을 훈련시키지만, 그 시스템이 창출하는 가치는 다시 북반구로 환류된다. 그러나 바티칸에서 작성된 이 회칙은 여전히 유럽 중심의 신학적 언어와 인식론적 틀 안에서 움직인다. ‘위대한 인류’를 말하면서, 그 인류 안의 불균등한 권력 구조에 대한 분석이 빈약하다는 것은 심각한 결함이다. 마리아의 찬가는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눅 1:53)라고 노래한다. AI 시대의 ‘주리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구체적 성찰이 더 요청된다.
둘째, 교회 내부의 AI 사용에 대한 자기 성찰이 없다.
회칙은 AI가 인간 사회에 미치는 위협을 경고하지만, 정작 가톨릭 교회를 포함한 종교 기관들이 이미 AI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강론 작성, 교리 교육, 신자 데이터 관리—에 대한 자기비판적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예언자적 목소리는 바깥을 향하기 전에 안을 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AI에 대한 비판은 도덕적 우월감으로 오해받기 쉽다. 교회가 AI를 도구로 사용하면서 동시에 AI의 위험성을 경고할 때, 그 목소리의 신뢰성은 어디서 오는가.
셋째, ‘몸 없는 AI’에 대한 신학적 질문이 충분히 심화되지 않았다.
회칙은 AI가 인간을 대체할 수 없다고 선언하지만, 왜 대체할 수 없는지에 대한 신학적 논증이 다소 선언적 수준에 머문다. 여기서 바울의 ‘소마’ 신학, 혹은 성육신(incarnation)의 신학이 더 깊이 개입해야 한다. 하나님이 ‘몸’으로 오셨다는 것—그것이 기독교 신학의 가장 급진적인 주장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 AI는 이 성육신의 역방향을 꿈꾼다. 육신 없는 지성, 몸 없는 말씀. 이 신학적 역설이 더 날카롭게 다루어졌다면, 회칙의 논증은 훨씬 강력해졌을 것이다.
넷째, 디아스포라 공동체와 소수 언어 문화에 대한 고려가 없다.
한인 디아스포라처럼, 언어적·문화적 소수자로 살아가는 공동체에게 AI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 AI는 번역과 소통의 장벽을 낮추어 디아스포라 신앙 공동체의 연결을 돕는다. 다른 한편으로 AI가 생성하는 표준화된 언어와 문화는 소수 언어와 고유한 신앙 표현 방식을 잠식할 위험이 있다. 디아스포라 신학의 관점에서, AI 시대의 문화적 정체성 보존은 단순한 민족주의적 과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양한 형상을 지키는 신학적 과제다.
광야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마니피카 휴마니타스』는 완전한 문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용감한 문서다. AI라는 광야 한복판에서, 교회가 침묵하지 않고 신학의 언어로 말하려 했다는 것—그 자체로 이 시대에 필요한 예언자적 몸짓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AI는 사람의 방언을 완벽하게 모사하는 단계에 이미 도달했다. 머지않아 천사의 말도 흉내 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을 가질 수 있는가. 몸을 가진 존재만이 경험하는 그 사랑—타자의 아픔에 자신의 몸이 반응하는 그 연민—을 알고리즘이 소유할 수 있는가.
『마니피카 휴마니타스』가 제기하는 물음의 핵심은 결국 여기다. AI 시대에 인간이 ‘위대’한 것은 더 많이 알고 더 빨리 처리하기 때문이 아니다. 몸을 가지고, 고통을 알고, 서로를 사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능력은, 어떤 모델도 학습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이다.
교회는 지금 이 물음 앞에 서 있다.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를 다시 묻는 것—이것이 『마니피카 휴마니타스』가 개신교 교회를 포함한 모든 신앙 공동체에 건네는 초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