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기독일보가 오프라인 발행 1천호를 넘어 새 이정표를 세웠다. 이민교회와 함께 걸어온 23년, 미주 기독일보는 이민의 삶 한복판에서 믿음으로 길을 열어 온 우리 주변 신앙인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이번에는 남가주 은혜한인교회를 섬기고 있는 한기홍 목사의 삶과 목회 여정을 들어봤다. 한 목사의 이야기는 성공한 대형교회 목회자의 이력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시골 소년의 순박한 기억,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시작된 인생의 질문,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 주유소에서 받은 전도지 한 장, 신학교로 이끄신 하나님의 강권하심, 40일 금식기도와 100일의 기도원 체험, 그리고 선교를 멈추지 않았던 순종의 시간이 그의 삶과 목회를 관통하고 있다. 한 목사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순종하는 것이 결국 축복이라는 것을 내 인생을 돌아보며 더 깊이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안성 시골 소년, 죽음 앞에서 인생을 묻다

한기홍 목사의 어린 시절은 경기도 안성의 시골 마을에서 시작됐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었고, 가족은 평범한 삶을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전학오기 전까지 한 목사의 정서는 냇가와 논, 밭과 작은 산, 할머니의 사랑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는 그 시절을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골의 낭만과 순박함이 내 정서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돌아봤다.

서울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책상 위에 선을 긋고 넘어오면 밀쳐내는 도시의 문화는 어린 한 목사에게 낯설었다. 시골에서는 떡도 나누고 마을 사람들이 가족처럼 지냈지만, 서울의 생활은 더 개인적이고 경쟁적으로 느껴졌다.

어린 시절의 꿈도 여러 번 바뀌었다. 한때는 가수를 꿈꿨고, 중학교 때는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 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건강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던 할머니도 이어 세상을 떠났다.

한 목사는 “죽음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가장 가까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동작동 국립묘지를 자주 찾았다. 선열들의 묘소를 참배하며 철학책을 읽고, 죽음과 인생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는 “내가 육체를 가지고 사는 동안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인가를 고민했다”며 “나라를 위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그 고민은 정치가의 꿈으로 이어졌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국회의원 아버지를 둔 친구 덕분에 국회 방청석에 앉아 대정부질의를 지켜보기도 했다. 보좌관들과 토론하듯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는 언젠가 자신도 나라를 위해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미국으로 향한 정치의 꿈, 주유소에서 만난 복음

대학 시절은 한국 사회가 격변하던 1980년대였다. 전두환 정권 시기, 대학가에는 데모가 일상이 됐다. 한 목사도 학생회 활동을 하며 당시의 시대 분위기 한복판을 지나갔다. 그러다 학생회장단 해외 순방 프로그램으로 인도, 대만, 태국을 방문하게 됐다. 처음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본 경험은 그의 시야를 크게 흔들었다.

그는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 있었는데, 세계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됐다”며 “세계의 중심지인 미국에 가서 선진 정치를 배우고 제대로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그는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였다. 함께 온 친구 가운데 한 명은 목사 아들이었지만, 한 목사는 여전히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주유소에서 그의 인생은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일하던 시간 앞뒤로 집사와 장로가 근무했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그에게 복음을 전했다. 어느 날 받은 전도지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독생자를 주셨으며,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복음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한 목사는 “혼자 일을 하다 보니 하나님이 계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근거는 어디 있는가 하는 마음의 싸움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도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게 됐다. “나를 만드신 분이 있다면, 그분만이 나를 다스리실 수 있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결국 그는 함께 일하던 집사에게 교회에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오히려 전도하던 이들이 크게 놀랐다.

처음 참석한 금요예배에서 그는 설교 내용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어 다음 근무자였던 장로의 권유로 주일에 찾아간 교회가 바로 은혜교회였다. 유학생으로 미국에 와서 만난 첫 교회였다. 그곳에서 그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으로 거듭났다.

대통령의 꿈이 신학교의 부르심으로 바뀌다

회심 직후 한 목사의 생각은 아직 세상의 꿈과 연결돼 있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났으니,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한국에 가서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구원의 감격이 처음에는 자신의 정치적 꿈과 맞물린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기도 중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마음속에 신학교에 가라는 부르심이 강하게 임했다. 한 목사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그는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고, 신학교의 길은 자신이 계획했던 길이 아니었다.

한 목사는 “그때부터 근심이 가득했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고 정치가가 돼야 하는데, 이 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계속됐다. 그는 결국 신학교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감사와 사명감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 얻어맞지 않으려고 간 것 같았다”며 “좋은 말 할 때 빨리 가야겠다는 마음이었다”고 솔직히 말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며 그의 마음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사야 43장의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이 그에게 깊이 임했다. 한 목사는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하시고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때부터 기도의 차원이 달라졌다. 그는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자신에게 전도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예수를 믿지 말아야 할 이유를 변론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회개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을 불러주셨다”는 깨달음 앞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는 하나님 앞에 40일 금식기도를 서원했다. 한 목사는 “이 상태로 목사가 되면 삯꾼이 될 것 같았고, 정치 목사가 될 것 같았다”며 “회개하기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작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원에서 100일을 머물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말씀을 두 번 반 묵상했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회개했고,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목사가 돼야겠다”는 결단을 했다. 한 목사는 그 시간을 “내 목회의 축복의 시간”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셨다”

올해 은혜한인교회에서 열린 부활절연합예배
(Photo : 교회 제공) 올해 은혜한인교회에서 열린 부활절연합예배

신학교의 길은 세상적으로 보면 잃어버리는 길처럼 보였다. 가족들은 대통령이 되겠다던 그가 신학교에 간다고 하자 실망했고, 한때 관계가 끊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 목사는 그 길에서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경험했다.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던 중 하나님은 환상 가운데 아내를 보여주셨다. 그는 “나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지만 하나님이 제 아내를 만나게 하셨고, 신분 문제도 해결해 주셨고, 두 아들도 주셨다”고 말했다. 훗날 두 아들은 모두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다. 불신자였던 가족들도 예수를 믿게 됐다. 동생과 조카들 가운데 목회자가 나오고, 형과 누나도 신앙 안에 서게 됐다.

한 목사는 “세상적으로는 망한 것 같고 다 잃어버린 것 같았지만,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 더 아름답게 가족 구원을 이루셨다”고 말했다.

한 목사는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다 보니 세상적으로는 잃어버린 것 같았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길이 됐다”며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는 것이 축복이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신 분”이라고 말했다.

상처 입은 70명의 교회, 행복한 교회가 되다

한 목사는 1992년 9월 샌디에고 갈보리장로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당시 교회는 분열을 겪은 뒤 성인 70명가량만 남아 있었다. 전임 목회자가 일부 성도를 데리고 교회 앞에 새로 개척한 상황이었고, 교회 안팎에는 상처가 컸다.

그는 “한인도 많지 않고, 교회도 분열돼 있고, 아주 척박한 상황 속에서 목회를 해야 했다”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매일 철야기도를 하던 중 하나님은 그에게 “행복한 교회가 되라. 행복한 목사가 되라”는 마음을 주셨다. 한 목사는 어떻게 행복한 교회와 행복한 목사가 될 수 있는지 하나님께 물었다. 그때 붙든 말씀이 마태복음 11장 28절이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한 목사는 그 말씀을 통해 목회의 방향을 보았다. 사람을 예수님께 만나게 하는 사역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야 행복할 수 있다”며 “구약은 오실 예수, 신약은 오신 예수와 다시 오실 예수를 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성도들이 복음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마음의 치유, 육체의 치유, 영적 치유의 간증이 이어졌다. 상처 입은 교회는 점차 행복한 교회로 회복됐다. 한 목사는 “12년 담임 목회하는 동안 아이들까지 거의 1,300명으로 부흥한 것은 정말 하나님의 큰 은혜였다”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 자녀처럼 마음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편안한 길이 아니라 사명의 길로

샌디에고 갈보리교회가 안정되고 부흥하던 때, 은혜교회 김광신 목사는 한 목사에게 교회를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김 목사는 선교지 사역을 더 감당하기 원했고, 건강도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 목사에게 은혜교회 부임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당시 갈보리교회는 빚이 없고 평안했다. 반면 은혜교회는 자체 성전 없이 여러 장소를 옮겨 다녔고, 선교 사역은 크게 확장돼 있었고, 재정적 부담도 컸다. 한 목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청빙은 더 큰 교회, 더 나은 환경으로 가는 것이겠지만 당시로 보면 샌디에고가 훨씬 좋은 환경이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기도 끝에 은혜교회로 가라는 확신을 받았다. 그렇게 2004년 9월 은혜교회 2대 담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그 결정을 “선교사로 가는 마음”이었다고 표현했다. 샌디에고에 갈 때도 한 지역을 섬기는 선교사로 갔고, 은혜교회에 올 때도 선교하는 교회를 섬기기 위한 선교사의 마음이었다.

한 목사는 “하나님은 제가 편안한 꼴을 못 보시는 것 같다”며 “뭔가 안정되고 나아질 것 같으면 다시 도전하게 하셨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지나고 보니 그 모든 일어난 일들이 과정 중에 좁은 문으로 저를 항상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했다.

행복한 교회, 상급 받는 교회, 세계선교를 마무리 짓는 교회

은혜교회에 부임한 뒤에도 한 목사가 붙든 것은 기도였다. 그는 하나님께 어떻게 목회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세 가지 방향을 받았다고 했다. 첫째는 행복한 교회, 둘째는 상급 받는 교회, 셋째는 세계선교를 마무리 짓는 교회였다.

말씀도 함께 주어졌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마태복음 24장 14절이었다. 한 목사는 이 세 말씀을 붙들고 은혜교회 목회를 시작했다. 이후 교회는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한 주에 수십 명씩 새 성도들이 몰려오는 때도 있었다.

비전센터 건축도 기도 가운데 시작됐다. 한 목사는 “저의 목회는 기도 목회라고 할 수 있다”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 비전센터를 선물로 주겠다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했다. 당시 프로젝트 규모는 4천만 달러에 가까웠지만, 교회에는 준비된 재정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은 꿈과 말씀만 주시고 돈은 안 주시는 것 같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남과 환경을 통해 길을 여셨다. 프라미스교회 김남수 목사가 축복성회 강사로 와서 “건축은 속전속결로 해야 한다”고 권했고, 한 목사는 건축팀과 상의한 뒤 믿음으로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2007년 건축을 시작했고,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통과해 2009년 5월 완공에 이르렀다.

한 목사는 “조금만 늦었어도 시작조차 어려웠을 것”이라며 “하나님이 김남수 목사를 보내셔서 빨리 시작하도록 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건축은 중단해도 선교는 계속

비전센터 건축 과정은 치열한 영적 전투의 시간이었다. 재정적 압박, 외부의 방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까지 여러 도전이 있었다. 그러나 한 목사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가장 강하게 보신 것이 선교였다고 했다.

은혜교회는 건축 중에도 선교 재정을 손대지 않았다. 건축비는 부족했지만 선교비로 적립된 재정은 선교지로 보냈다. 한 목사는 “그 유혹이 컸다. 그 돈으로 건축하면 빨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며 “그러나 그것을 선교비로 다 드렸고, 하나님 앞에 그 시험이 통과된 것 같다”고 말했다.

비전센터 완공을 앞두고는 선교사들을 초청해 선교대회를 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당시는 건축은 늦어졌고 재정도 어려웠다. 선교사들의 항공료만 20만 달러가 넘었다. 그래도 약속을 지켰다. 선교사들은 헬멧을 쓰고 건축 현장을 돌며 기도했고, 교회는 미완성의 현장 속에서 선교대회를 열었다.

한 목사는 “성도들에게 교회 건축하다가 재정이 모자라면 건축은 중단해도 선교는 한다고 말했다”며 “이 건물은 선교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팬데믹도 멈추지 못한 선교

은혜한인교회 담임 한기홍 목사
(Photo : 기독일보) 은혜한인교회 담임 한기홍 목사가 인터뷰에서 간증하고 있다.

비전센터 안에 마지막으로 완공된 공간은 24시간 기도센터였다. 한 목사는 “성도들이 언제든지 교회에 와서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기도센터는 은혜교회 선교 사역의 영적 심장처럼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후 팬데믹이라는 또 다른 도전이 찾아왔다. 성전은 하루아침에 텅 비었고, 예배는 카메라 한 대 앞에서 드려야 했다. 헌금 방식도 바뀌었다. 1세 성도들은 헌금을 직접 드리는 문화에 익숙했기 때문에 재정의 어려움은 더 크게 다가왔다.

가장 큰 고민은 선교였다. 한 목사는 “팬데믹이라고 해서 선교사님들이 생활에 필요한 비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라며 “때문에 그 가운데서도 선교비 지원은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헌신했고, 선교는 계속됐다. 오히려 팬데믹은 새로운 문을 열었다. 온라인과 영상 강의를 통해 28곳의 신학교를 더 넓게 섬길 수 있게 됐다. 한 목사는 “그전에는 60개국을 다 다녀도 끝이 없었는데, 팬데믹을 지나며 온라인으로 더 넓게 섬길 수 있게 됐다”며 “지나고 보니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했다.

다음세대가 이어받은 선교의 DNA

은혜교회는 올해 44주년을 맞았다. 한 목사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가장 감사한 열매 가운데 하나로 다음세대를 꼽았다. 은혜교회와 GMI의 선교 DNA가 다음세대에게 전수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2023년 팬데믹 이후 열린 세계선교대회에서 영어 회중(EM)이 주축이 돼 선교대회를 섬긴 일을 언급했다. 다음세대가 50만 달러를 헌금하며 앞장섰고, 선교사 파송에도 함께했다. 한 목사는 “모든 세대가 함께 선교하게 되는 열매가 맺어진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며 “온 가족과 모든 세대가 함께 예배하고 선교하고 비전을 이루는 사역으로 가고 있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선교 방향도 분명했다. 그는 선교사들의 고령화와 선교사 파송 감소 속에서 선교사 자녀, 곧 MK들이 중요한 자원이라고 했다. 또 다중심적 선교, 곧 여러 지역과 세대가 함께 선교 주체가 되는 패러다임을 강조했다.

은혜교회 로고인 민들레처럼, 복음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한 목사는 “우리가 섬겼던 선교지에서 이제 그들이 다시 선교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며 “44년 동안 현지에 신학교를 세우고 현지인들이 자기 언어로 복음을 전하도록 사역해 왔는데, 이제는 그들이 선교하게 되는 것이 정말 가슴 뭉클한 일”이라고 말했다.

새벽예배로 지켜 온 목회자의 자리

한 목사는 지금도 새벽예배를 지킨다. 설교는 부목사들이 맡을 때도 있지만, 그는 새벽예배를 인도하고 환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팬데믹 이후에는 새벽에도 안수기도를 이어 왔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새벽예배를 드리고, 새벽 3시 반부터 7시까지는 예배와 개인기도의 시간으로 지킨다.

그는 “내 영적 관리뿐 아니라 내 자신의 영성을 순수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목회 스트레스를 무엇으로 푸느냐는 질문에 그는 “예배로 푼다”고 답했다.

한 목사는 “구원은 받았지만 육신은 끊임없이 세상을 향해 끌어당긴다”며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말씀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천국 갈 때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고 싶다”며 “지도자일수록 실수하면 후유증이 크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행복한 목사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고생이 심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 행복하다”는 고백이었다.

나누라고 세워 주신 교회

한 목사는 은혜교회를 크게 세우신 이유를 “나누라는 사명”으로 이해하고 있다. 오렌지카운티 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미자립교회와 어려운 교회를 섬기고, 목회자 세미나와 지원 사역을 이어가는 것도 그 연장선이다. 교단과 선교단체, 킴넷(KIMNET), 자마(JAMA), 다민족기도회 등 초교파 연합 사역에도 힘을 쏟고 있다. 또 은혜교회는 미국에 세워진 한인교회로서 미국을 위해서도 기도하며 지역 및 미국 주류 사회와 미국 교계에도 선한 영향력을 주고 있다.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갔을 때, 세상적으로는 잃어버린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더 아름답게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계속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말은 ‘하나님은 항상 옳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진정한 성공은 지금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을 때까지 표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목회자의 길이자 그것이 진정 행복한 길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