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이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며칠 전 보수 정치의 젊은 리더였던 찰리 커크(31세)가 유타의 한 대학에서 강연중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 때문입니다.
그가 쓰러지는 장면이 뉴스에 그대로 방영되며 많은 미국인들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도대체 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요? 우리는 성도로서 어떤 마음으로 이 사건을 바라봐야 할까요?
일단 정치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어느 진영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극단적 상황을 제하고) 그 누구도 상대의 목숨을 빼앗을 만큼 정당한 이유를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분열과 증오의 극단은 살인입니다.
왜 증오할까요? 그것이 무엇이든 증오할 만한 이유를 상대로부터 찾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마 7:4)' 성경은 남의 작은 티보다,내 안의 더 큰 들보에 집중하게 합니다. 부부가 싸우는 이유는 상대를 고치려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나의 연약함을 고치려하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남을 고치려는 시도의 문제점은, 내 속의 문제를 잊게 함에 있습니다. 남의 문제에 분노하며, 자신의 문제에 침묵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를 변화시키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남을 바꾸는 정치인으로 오시지 않고, 나를 바꾸는 대속자로 오신 겁니다.
남을 바꾸다 안되면 어떤 극단으로 갈까요? 살인으로 갑니다. 마치 이번 암살범처럼 말입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입니다.교회와 성도는 이 혼란의 시기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도 분노하여 어느 집단을 막말과 폭력으로 억지로 바꿔야 할까요?
그것이 과연 교회와 성도의 사명일까요?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하십니다. 누가 화평하게 할 수 있나요? 남이 아닌 내 자신의 연약함을 보고 울 수 있는 사람이 화평케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는 남의 연약함보다 나의 연약함이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복있다 하십니다.
분열과 증오의 현장 속에서, 말 없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유가족과 상처 입은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