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겉으로는 질적인 성장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교인들의 수평이동을 부정적으로 폄하하기도 했지만, 속으로는 주일 예배 때 참석한 교인 수와 헌금 액수에 저절로 시선이 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더군요. 시간이 가면서 내가 추구하는 교회와 목회의 모습에 대한 그림이 좀 더 선명해지면서 양적 성장에 관한 숨겨진 욕심이 약해지긴 했지만, 이제 목회 현장의 막바지에 와있는 이 순간에도 주보에 있는 헌금 액수와 설교단에 서서 눈에 들어오는 참석 인원에 관한 나의 눈길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물론 지금은 훨씬 자유로워졌지만 말입니다.

이런 경험이 어찌 나에게만 있겠습니까 만은 이런 압박을 견뎌낸다는 게 쉽지 않기에, 현실에 타협하게 되면서 그 압박감은 차원을 달리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 스스로 지쳐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목회자들은 이런 현실적 고뇌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며, 주님이 세우시려 했던 교회의 원형을 추구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특히, 작은 교회에 부임하거나 교회를 새로 개척하는 경우에, 목회자는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목회 사역 외에 일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사모도 남편의 사역을 돕기 위하여 일자리를 찾는 경우가 일반적이지요. 이럴 경우, 목회자 부부가 목회와 생계를 감당하느라 과부하가 걸려 원활한 목회 사역이 어렵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심신이 지쳐서 목회자도 지치고, 교회 식구들도 교회 공동체 삶이 피곤하게 느껴집니다. 목회 초기에 가졌던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려던 활력과 희망이 점점 옅어져서 목회 현장에 있는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거나, 아니면 현실과 타협해버리게 됩니다.

주변에 교회 개척에 관한 자문을 구하는 젊은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기존의 전통적인 개척 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개척을 하기 위해서 함께 동행할 개척 멤버가 필수인데도, 무작정 목회자 가정집에서 개척 예배를 드리고 목회를 시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혹시 함께 동행하는 성도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목회자와 함께 같은 비전과 가치관을 갖추기 위하여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채 교회를 세우는 바람에 초기 개척 멤버들이 떠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개척 당시에 가졌던 성경적 교회에 대한 꿈은 어느새 그냥 꿈으로만 남게 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제가 지난 수 년간 미드웨스턴 신학교 한국부에서 “성경적 목회와 교회 모델”이라는 과목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 수업에서 제가 그동안 해왔던 목회와 교회의 모습을 나눌 때면, 진지한 관심을 보여주는 목회자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이분들이 나에게 하는 얘기 중에, “초대교회에 관한 원리를 배웠고, 또 그것에 대한 방안을 토의하고 연구하기도 했지만, 결론은 과연 이 시대에 그런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 허탈할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냥 이론으로만 그치고 말기에, 목회 현장에 있는 자들로서 목회에 관한 어떤 희망을 갖는 게 쉽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시도하고 있는 목회 현장 얘기를 들으면서, 적어도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는 교회를 만났다는 것에 희망이 생긴다고 합니다. 적어도 시도를 하고 있는 목회 현장이 있다는 사실에 큰 의미가 있다면서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 교회는 이상적인 교회일까요? 나의 목회는 모범적일까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눔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는 아닙니다. 아직도 재정이 충분하지 않아, 무슨 사역을 하려고 해도 쉽게 한 발을 내딛기가 쉽지 않습니다. 교회의 여러 지체들을 도울 수 있는 헌신자들이 모자라서 진땀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역자들에게 생활비를 충분히 줄 수 있는 규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몸이 상해서 병원 신세를 지는 빈도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그게 스트레스 때문에 온다고 진단한 의사가 나에게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하네요. 그런데 그게 됩니까?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 목회가 행복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면, 이 일을 할 것이냐 묻는다면, 그럴지도 아닐지도 모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길에 들어선 것은 주님께서 제게 요구하셨기 때문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생명을 살리는 목회’라는 첫 부르심에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다만 이 길을 갈 거면, 이왕이면 제대로 가보자는 마음으로 시도해 보는 거지요. 그러면서 혼자서 빙긋이 미소를 짓기도 합니다. 함께 해준 가족들 때문에 감사의 마음이 들고요. 나를 신뢰해 주는 교회 식구들 때문에 마음이 따스해집니다. 여전히 저는 목회를 배우고 있고, 그 목회를 통해 교회가 무엇인지 알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