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갈등으로 빚어진 의료공백사태가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한 평생 병자를 치료하고 가난한 약자를 돕는 일에 헌신한 두 의사의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5일 제52회 보건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모란장과 석류장을 각각 수여한 고 로제타 홀 선교사와 고 박상은 안양샘병원 미션원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두 의사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으로 한국의 보건의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란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이룩한 의료적 업적 못지않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건 두 사람 모두 일생을 가난하고 병든 이웃과 약자를 돌보는 선교적 삶에 투신했다는 점이다. 

1865년 미국에서 출생한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선교사는 1889년 3월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듬해인 1890년 25살 젊은 나이에 미국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WFMS)에 의해 한국 선교사로 파송됐다. 1년 후 내한한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와 1892년 한국에서 결혼해 아들 셔우드 홀을 낳았으나 남편이 갑자기 전염병에 걸려 1년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남편 사망 당시 배 속에 있던 딸마저 3살 어린 나이에 풍토병으로 잃는 크나큰 불행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런 고통 속에서도 무려 43년 동안 의사로서 한국의 가난한 여성과 어린이, 장애인 환자를 돌보는 선교사역에 집중했다. 

그녀가 이 땅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며 남긴 신앙 유산이 하나둘이 아니다. 남편 모교회의 후원금으로 평양에 광성학교를 설립하였고, 여성병원인 광혜여원을 세웠다. 광혜여원은 당시 로제타 선교사를 박해하던 평안 감사가 자기 부인의 병을 치료해 준 감사의 표시로 헌납한 건물에 세웠다고 한다. 

로제타 선교사가 광혜여원에서 한 사역 중에 특히 주목되는 게 시각장애인을 위한 헌신이다. 1898년 이곳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육이 처음으로 시작됐고, 후일 평양 맹인학교로 발전하게 됐다. 시각장애인 교육을 위해 로제타 선교사가 직접 개발한 '점자법'은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로제타 선교사가 남긴 훌륭한 신앙 유산은 그녀의 주 선교 사역지였던 평양에 산적해 있으나 남북이 분단된 뒤 북한 당국에 의해 파괴되거나 모든 흔적이 지워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평양에서 20년간의 선교활동을 접고 1917년에 서울로 임지를 옮기게 되면서 서울과 인천 등지에 그녀가 남긴 수많은 의료 업적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은 퍽이나 다행스럽다. 

그녀가 서울에 와 첫 번째 한 일이 현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전신인 동대문 부인병원 사역과 여성 의료인 양성을 위한 여자 의학반 개설이다. 이어 1921년 동대문 부인병원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제물포 부인병원(현 인천기독병원)을 세웠다. 그 후 조선 여자의학 강습소를 설립해 운영하면서 이것이 1928년 경성 여자의학 전문학원으로 이어졌는데 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로제타 홀 선교사는 1933년 68세 나이로 선교사에서 물러나며 한국 땅을 떠났다. 미국에서 1951년 8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시신은 유언대로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양화진 남편 곁에 합장됐다. 지금 양화진 외국인묘역엔 딸 에디스와 어머니에 이어 평생을 한국에서 의사로 헌신하다 91세에 세상을 떠난 아들 셔우드 홀, 며느리 매리언 홀까지 다섯 명의 가족이 잠들어 있다. 

보건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여한 또 한 사람의 독실한 크리스천 의사는 고 박상은 안양샘병원 미션원장이다. 박 원장은 지난해 11월 5일 베트남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나 한국교회에 큰 슬픔을 안긴 인물이다. 

고 박 원장은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가난한 환자를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친 장기려 박사의 제자로 수련의 생활을 했으며, 스승의 가르침대로 의료취약 계층들을 돌보며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는 의사의 삶을 살았다. 2000년에 안양샘병원 원장에 부임해 병원 설립자인 이상택 박사와 함께 안양샘병원을 선교 지향 병원으로 탈바꿈시킨 건 한국교회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샘글로벌봉사단을 설립해 매년 취약계층 1,000여 명에게 무료 주말 진료를 실시하는 등 약자를 도왔으며, 사단법인 아프리카미래재단을 설립해 아프리카 극빈 지역에서 에이즈 예방사업과 영양강화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고 장기려 박사의 뜻을 기려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설립에 참여하고, 2014년부터 3년 동안 대통령 직속기구인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한국교회가 존경하는 대표적인 의료선교 리더로 손꼽힌다. 

의사로서의 박 원장의 삶을 말할 때 꼭 언급되는 세 단어가 '생명 사랑 존중'이다. 모든 의사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지만 그만큼 생명 사랑의 가치를 치열하게 세상에 실천한 의사도 드물 것이다. 낙태 반대 운동에 앞장서며 기독교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선한 영향력을 끼친 점은 한국교회가 반드시 기억하고 귀중한 업적으로 기록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 곁을 떠난 두 분의 진정한 의사를 생각할 때 지금의 의료 공백사태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치료가 필요한 환자를 외면하는 의사, 그런 의사를 압박하는 데 치중하는 정부가 벌이는 대결구도를 보면 환자들의 존재는 아예 잊은 듯하다. 

134년 전 의료선교사로 이 땅에 와 43년간 가난한 병자를 돌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로제타 홀 선교사와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생명사랑을 실천하며 의료 취약 계층을 헌신적으로 돌본 박상은 원장, 두 의사는 오늘의 의료 공백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모든 갈등의 요소가 하루속히 원만히 해소돼 각자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