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을 지킨 사랑
여호수아 22장 1절-9절
여호수아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한 장면을 꼽으라면 오늘 말씀이다. 물론 여호수아서에는 이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다. 요단강물이 멈춘 사건, 여리고성 함락, 태양이 멈춘 일, 갈렙의 헤브론 점령하는 이야기는 정말 놀라운 일들이다. 오늘 말씀은 강렬한 기적은 없다. 그런데 가장 평범하면서도 진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다. 강력한 기적보다는 이런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가 우리의 삶에 가깝다.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살면 하나님께는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장 영적이고 멋진 교회가 될 것이다.
가나안 땅 정복이 마무리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로에서 다함께 모였다. 그리고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지파를 불러서 축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1절과 2절을 보자. “1.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2.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 두 지파 반에게 말했다. “모세가 명령한 것과 내가 명령한 것을 다 지켰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들이 약속한 것을 다 지켰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큰 칭찬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목사가 성도에게 성도가 목사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모든 범죄와 사기는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것에서 발생한다. 약속을 할 때에는 모든 좋을 것을 다 줄 것처럼 속이고, 원하는 것을 다 챙기고 나면 말을 바꾸고, 도망가고,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 인간의 근본적인 불행도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시작된 것이다.
두 지파 반이 지킨 약속의 내용을 살펴보자. 두 지파 반은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정복한 땅이 탐이 나서 자기들에게 그 땅을 차지 하게 해달라고 모세(모세가 살아 있을 때)에게 요청했다. 약속을 어기는 행동을 한 것이다. 이런 이들의 모습이 나머지 지파들에게 실망감을 주고, 분노를 유발시켰다.
다행히 모세의 중재로 어려운 상황이 원만하게 잘 해결했다. 나머지 지파들은 가축이 많았던 두 지파 반을 배려해서 땅을 먼저 차지하게 했고, 두 지파 반은 받은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 나머지 지파가 땅을 다 차지할 때까지 완전무장하고 모든 전쟁을 선봉에서 싸우기로 했다. 두 지파 반에 속한 4만명의 남자들이 완전 무장을 하고 나머지 지파들과 함께 요단강을 건넜다. 그리고 두 지파 반은 자기들이 한 약속을 끝까지 다 지켰다.
여호수아가 두 지파 반에게 한 말을 들어보면 약속한 것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3절을 보자.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날이 오래도록” 이 표현이 중요하다. 약속을 지키려고 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이 시간이다. 시간이 지나면 처음 가졌던 마음이 희미해진다. 마음 속에 꾀가 생기기도 한다. 상황이 다급하고, 정말 가지고 싶은 것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지키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한다. 물론 그때 한 약속은 진심에서 우러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 다급함이 사리진다. 정말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가져보니 그것도 별것 아니게 느껴진다. 자기가 받은 것에 대한 감사는 사라지고 의무와 책임만 남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은 7년이나 걸렸다. 두 지파 반은 전쟁을 할 때마다 가장 위험한 선봉에 서서 싸웠다. 전쟁을 하면서 동료가 죽거나 부상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왜 우리만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가?라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희생 없이 신실함이 나올 수 없다. 수고 없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
두 지파 반은 과거에 자기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 지파들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했다. 욕심보다 신실함을 택했다. 눈 앞에 보이는 이익보다 약속을 지키는 것을 선택했다. 두 지파 반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아홉개 반 지파가 용서하고 배려한 결과이다. 이것이 용서의 능력이다. 한번 잘못 했다고 정죄하고, 심판해 버리면 회복할 기회를 잃게 된다. 그런데 기회를 주면 만회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용서로 두번째 기회를 얻은 사람들이다. 용서는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자기 변명을 위해서 용서를 원한다면 그 용서는 가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죄를 계속 짓기 위해서 용서를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사람이 된다. 은혜를 받았다면, 용서를 받았다면 회복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욕심 때문에 신실함을 포기하지 말라. 눈 앞에 보이는 이익 때문에 약속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22:1)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이 있다. 두 지파 반이 책임을 다하고, 충성을 다했다는 것을 누가 인정해 주는가? 여호수아와 나머지 지파들이 인정해줬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공로를 스스로 칭찬한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기 입으로 말한다. 자기 입으로 말한 것은 하나님이 카운트 하지 않으신다. 사람들도 크레딧을 주지 않는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자기 스스로 엄청난 일을 했다고 말을 했다. 얼마나 자부심이 있었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라고 하셨다. 우리가 스스로 한 자랑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말이 될지 두렵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셔서 진짜다. 사람들이 말해줘야 의미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는가? 스스로 말하지 말라. 하나님이 드러내시게 하라. 사람들이 말하게 하라.
여호수아가 두 지파 반을 돌려보내면서 두 가지를 했다. 첫번째는 정말 중요한 신앙의 조언을 했다. 5절을 보자.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두 지파 반은 이뤄야할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이루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이때부터가 더 중요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마음과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일이 주어지면 열심히 한다. 그 일을 할 때에는 정말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일을 하지 말고 예배를 드리가고 하면 불안해서 견디질 못한다. 마치 믿음이 없고, 신앙이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일을 하라고 하면 잘 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면 어떻게 사랑할지 모른다. 자기가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내가 한 것에 대해서 칭찬을 들어야 존재감을 느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랑하는 것을 먼저 배우라. 하나님을 사랑해서 섬김과 봉사를 하라. 믿음의 섬김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필요한 곳에서 섬김을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지파 반을 떠나보낼 때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8절을 보자.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 하매.” 두 지파 반이 선봉에서 싸우는 것은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었다. 땅을 먼저 분배 받는 이익을 얻는 댓가로 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들이 한 수고와 희생의 댓가는 이미 지불되었고,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 지파 반을 돌려보낼 때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탈취물과 전리품을 후하게 주어서 가져가게 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축복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하는 섬김과 봉사는 구원받은 우리가 당연히 해야하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했다고 하나님께 더 요구할 것이 없다.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9-10) 우리가 아무리 봉사하고 섬긴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갚을 길은 없다. 우리는 섬긴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할 일을 한 것뿐이다.”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다.
오늘 우리는 두 지파 반과 나머지 지파 사이에 일어난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다. 아홉개 반지파가 기회를 주었을 때 자기를 먼저 생각했던 두 지파 반이 형제를 위해서 싸우고, 약속을 지키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머지 아홉개 반 지파는 이들의 수고를 인정하고 칭찬하고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신앙으로 격려하고 자기들의 것을 나누어 주었다.
이 말씀이 생각이 난다.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겪려하고,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역자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