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선교는 실로 험난했다. 당시 최고 권력인 로마의 가이사 앞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을 호송하는 배에서 난파당하는 어려움도 겪었다(행 27장).
원래 그는 출항 전, 지중해의 파도가 높아(11월부터 익년 3월까지) "지금 항해를 하면 배뿐만 아니라 인명까지도 위태롭게 된다"며 겨울을 지내고 갈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인 바울의 의견은 소위 베타랑 전문가들(선장과 항해사들)을 포함한 275명 승객들의 가세로 맥없이 무시되었다.
마치 다수가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믿으려는 오늘날의 분위기와 같다. 사실 평온할 때 닥쳐 올 비극(그것이 진리임에도)을 경고하기는 실로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경고했던 그 일이 발생했을 때의 완전한 해결과정이다.
결국 그들은 폭풍을 만났고 14일 동안 먹고 마시는 일은 물론 생명까지 잃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 배에 동행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은 일순간 혼비백산이 되었고, 함께 살 의견을 나누기는커녕 혼란을 틈타 '이제 자신만이라도 살겠다'는 비겁한 꼼수와 무모한 행동까지 서슴없이 하였다.
이러한 분열의 상황과 방향의 상실 속에서 바울(절대소수)은 275명(절대다수)에게 "용기를 내어 음식을 먹으라"고 권유를 하고 오히려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간과하기 쉬운 사건의 원인과 해결과정에서의 난제까지 정확하게 분별하여 대처함으로써 모두를 무사히 목적지로 인도해 냈다.
필자는 바울의 이런 행동에서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교회와 성도들의 진정한 역할을 떠올려본다.
2024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고국 대한민국과 우리가 사는 미국은 총선과 대선이라는 큰 선택의시간이 다가오고 잇다. 백성들에게 이전의 이슈들은 경제적인 문제가 우선 선택사항이었다. 그런데어찌 된 일인지 헌법적/정치적/통치적/윤리적 가치를 넘어 인류보편적 가치를 걱정해야 하는 부분들이있어서 염려와 두려움의 양가감정이 든다.
상대편에 대한 존중이 없는 파트너십은 없고 다만 공격의대상으로만 여겨 백성들의 마음을 더 심란하게 해 더 걱정스러운 마음이다. 교회와 성도들이(하나님의대리자들) 이러한 세상통치적 대립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의 경고와 메시지를 선포의 메시지가 없다는것에서 참람하지 않을 수 없는 심경이다.
이와 같이 혼란하고 복잡한 사건해결의 열쇠는 "위험과 혼란을 꿰뚫고 보는 안목과 두려움 없는 용기의 선포가 필요하다. 이러한 안목을 위의 바울에게서 배운다면, 그는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바로 '깊은 기도'를 통해서 얻었다고 했고(행 27:23 이하), 세상(사탄)의 시험에 예수님도 기도의 능력을 누누이 강조했다(막 9:29).
또한 이 영험한 분별력은 전통적 고집이나 인기에 영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바울처럼 외로움과 고통을 동반한 고독을 감수하면서도 혼돈의 사람들에게 안전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극한 대치의 갈등을 중재하려는 화평케 하려는 선포의 말씀이다.
인류역사(개인사, 국가사 등 모두 포함) 속에서 매번 반복되는 폭풍 속과 혼란을 일관되게 꿰뚫어 볼 섭리의 안목이 절실하다. 곧 인간은 예수그리스도릍 통해서 하나님께로 결국 돌아가야 한다는 진리의 길 말이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 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벧전3:12~13).
여기서 우리를 해하는 누가는 사람만이 아니라, 사건과 상황 그리고 재앙과 죄(사탄)이다. 주님은 우리가 대항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들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고 지키신 다는 믿음의 눈으로 이 극심한 선택의 상황을 보자! 우리들 앞에 다가오는 2024 유라굴로와 같이 요동치는 현실의 파고에 정치(인/당/세력/집단...)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가치를 구하는 지를 꿰뚫어 봐야 할 2024년이다. 이 정치뉴스를 검증 없이 퍼 나르고 주입하는 언론세력도 포함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