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계보에는 네 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나온다. 시아버지 유다에게 쌍둥이 아들을 낳아준 다말, 여리고의 성벽 위에 살던 기생라합, 모압 여인 룻(모압 족속은 롯의 큰딸이 자기 아버지에게 낳아준 아들 모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윗과 불륜 관계를 맺고 나라를 뒤흔들어 놓은 밧세바, 네 여인 모두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흠결을 지니고 있다.
왜 마태는 수많은 여인들 중에서 이들의 이름만을 기록했을까? 성경 학자 윌리엄 바클리는 세 가지 의미를 짚어냈다. 첫째로, 예수님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무너졌다. 둘째로, 예수님 때문에 남성과 여성의 장벽이 무너졌다. 셋째로, 예수님 때문에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졌다. 그 자신이 세리로서 동시대 사람들에게 철저히 거절당했던 마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반열에 들어선 이 여인들에 대한 감정이 특별했을 것이다.
마태는 가버나움 지역의 세리였다. 당시의 세리들은 로마정부가 일정한 지역에 부과한 세금을 미리 대납하고 일 년 내내 제한 없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샀다. 그들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창녀처럼 취급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던 날, 마태는 잔치를 배설하고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친구라야 죄인들뿐이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그 잔치에 참여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2-13).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주변에 전도할 사람이 없다. 맞는 말이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의 죄와 악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전도할 기회까지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늘 죄인들 곁에 계셨음을 잊지 말자. 지금도 예수님은 죄인들을 찾으신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왕
약혼녀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다. 요셉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 요셉은 거듭 숙고한 후에 조용히 일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처녀에게 애를 들어서게 해놓고 내버렸다고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했다. 그래서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결심을 실행에 옮기려고 기회를 찾고 있을 때에 천사가 꿈에 요셉을 찾아왔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1:20-21).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낯익은 이름이다. 구약에서는 ‘여호수아’, ‘예수아’, 또는 ‘호세아’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는데 ‘여호와는 구원자’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여호와의 구원을 갈망하는 의미로 그 이름을 자녀들에게 붙여주었다.
왕이 자기 백성을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위기로부터 구원하는 일은 당연한 의무다. 그러나 왕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한다는 말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왕들은 우민정책(愚民政策)으로 백성들을 죄의 소굴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들은 술과 성(性)과 폭력이 난무한 사회생활을 조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의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신단다. 세상에 이런 왕도 있을까?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는 방법 마저도 생소하기 짝이 없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