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은 사실 어제 일도 잡을 수 없고, 내일 일도 잡을 수 없는 존재이다. 어쩌면 로마신화에 나오는 두 얼굴의 야누스(Janus)처럼 한쪽 얼굴은 뒤를 바라보며, 반대쪽 얼굴은 앞을 바라보고 있는 모양새이다. 1월은 지나간 해를 바라보는 것과 다가오는 새해를 동시간적인 의미가 있다해서 1월을 영어로 재뉴어리(January)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 어원이 야뉴스에서 유래된 것이다.
성경 고린도후서 4장 16 ~ 18절에서 바울도, 우리의 겉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낡아진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앞의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보았던 것은 잠깐 지나가는 사망과도 같은 것이지만, 정말 중요하고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새해 1월에는 이 영원한 생명만을 더 주목해야 한다. 영어 성경은 '주목한다'는 'We fix our eyes.'라고 표현했다. 우리의 눈을 미래로 고정하라는 것입니다. 뒤돌아 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뒤를 돌아보려고 한다. 앞만을 보기가 쉽지가 않다. 어쩌면 야누스처럼 앞도 보고 싶어 하지만 뒤도 문뜩문뜩 보는 습관을 떼낼 수 없다.
그것은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일과 사람에 대한 상한 감정과 분노심과 적개심, 그리고 내 뜻대로 달성하지 못한 어떤 계획들에 대한 아쉬움과 상심 등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 마음 한구석에 살아있기 연고일 것이다. 우리들의 눈과 마음이 이미 지나가 버린 옛 모습에 고정이 되었다면, 이런 것을 과감하게 벗어나서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새로 다가오는 희망과 영원한 것에 눈과 마음을 고정하는 단련의 시간을 1월은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앞의 희망과 결론에 눈과 마음이 고정이 잘 안 된다. 왜일까? 보이기만 한다면 고심 없이 뒤도 안 볼 텐데... 왜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안 보이게 했을까? 우리는 가끔 신앙과 현실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려는 데 결코 그럴 수가 없다. 현실세계에서의 아시안컵 축구나 슈퍼볼 같은 운동경기에 이미 승부가 다 나고 결과가 나온 게임을 누가 보러 가고 밤늦게 자국의 팀이 이기기를 바라며 TV앞에 앉아 있겠는가? 그 게임에 미래 즉 결과를 모르니깐 자기편을 응원하고 성원을 보내고 하는 것이 아닌가? 현실의 모든 일들도 미래를 모르니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쓰고 하는 것이지 이미 결론이 다 나있는 것이면 누가 그것을 하려고 하겠는가?
시애틀에 막 정착했을 때, 이제 막 교회를 다니신 어떤 교수께서 저에게 찾아와서 상담을 청했다. "목사님,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어떤 사람은 구원시키고, 어떤 사람은 사망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시나요. 모두 다 좀 구원해 주시면 좋지 않을까요?" 제가 잠시 그분의 질문을 듣고 어떻게 잘 설명하여 이 분의 입장에서 이해시킬까 하고 잠시 묵상을 하다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교수님, 저 학생들에게 중간고사 기말고사 보고 성적을 매기셨죠? " "네, 당연하죠 목사님" 그러면 그 학생들 다 A 주셨는지요?라고 물으니깐 , "아니요 열심히 해서 제의 기준에 따라서 성적을 매겼지요?" " 네 그렇지요. 교수님이 보시기에도 어떤 학생은 정말 열심히 해서 교수님의 기준을 만족시킨 학생이 있을 것이고, 어떤 학생은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고 지도했는데도 그 기준에 너무도 미달인 학생이 있었다면 그 학생에게도 A 학점을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랬더니 그 교수께서 금방 잘 이해가 되었다는 답변을 들었다.
우리에게 미래를 볼 수 없게 하신 것은 주님의 더 깊은 배려요, 은총이다. 그래서 새해에 다시금 설계를 하고 계획을 세우며 결심을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올 한 해를 다 알도록 하시고 우리가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다 합격점을 준다면, 우리는 기도도 하지 않을 것이며, 예배도 대충 드리며, 노력하기보다는 멍 때림으로 발전도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어느 기준을 요구하거나 필요하지 않은 운수대통 혹은 사주팔자의 요행을 바람으로 인해서 아주 자주 앞과 뒤를 동시에 쳐다보아야 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 편지를 보내는 이유가 바로 그의 적대자들로부터 극심한 반대와 모함을 받았다. 네가 예전에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가 죽이고 고문했던 핍박자이었던 과거를 문제 삼았다. 그들의 저주와 같은 비난에 바울은 "그래, 내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이 나를 지배했지만,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알게 되었기에 이제 내가 더 이상 뒤의 것은 바라보지 않고 이제 그 어떤 환란과 어려움이 있어도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만을 바라볼 것이다"라는 말로 대응을 했다.
지금 잠깐 보이는 이 썩어지고 늙을 육신을 위한 율법이 아니라, 썩지 아니하고 매일매일 새롭게 될 영원한 속사람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영원한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심령 속에 임하시고 그의 나라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생명이 주님의 카이로스 시간에 맞춰서 오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1월은 회상과 전망이라는 두 얼굴의 시간이다. 새해가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이루었던 것을 보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무엇을 시작하느냐이고,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 보다는 내가 무엇을 계속 바라고 있느냐를 보라는 것에 더 큰 방점이 있다.
우리 앞에 놓인 희망과 결과를 모른다는 이유와 2개의 얼굴을 가진 1월의 속성 때문에 새 결심과 계획을 세우지 않거나 미적미적할 일은 분명히 아니고, 새로운 희망과 결단의 힘이 지난 일에 대한 후회나 미련을 제거할 수 있음의 용기를 보라는 뜻이 아닐까!
'우리가 주목하는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는 것 = 과거, 보이지 않는 것 = 미래로 대입시켜서 읽어보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