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의과대학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원을 졸업한 후 마다가스카르에서 의료 선교를 하고 있는 이재훈 선교사가 15일 오륜교회 다니엘기도회에서 '길에서 만난 하나님(신명기 8:2)'을 제목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이재훈 선교사는 "저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혼자서 5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어느 때부턴가 교회에서 전도하면 주는 책갈피, 성구가 적혀 있는 책갈피를 모으는 게 취미였다. 새로운 학년이 될 때마다 제 반 친구들은 제 책갈피 수집을 위해서 한 번씩 교회에 왔다. 그 가운데 온 가정이 불교인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 친구와 아주 친해지게 됐고, 누가 먼저 가족을 전도하느냐 내기를 했는데 제가 졌다. 그래서 하나님께 따졌는데,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한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다). 제 믿음이 가짜인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이어 "가짜인 걸 알게 되니까 겁이 덜컥 났다. 그래서 '하나님께 아프리카 선교사가 될 테니 저를 진짜로 여겨 달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전 아프리카에는 식인종이 있고 각종 맹수들과 뱀과 심지어 식물까지도 사람을 잡아먹는 걸로 알고 있었다. 거의 저의 전 인생을 건 것(기도)이었다"며 "약속을 지킨다는 표시를 해야 될 것 같은데, 그 당시에 학생으로서 최선을 다해야 될 것 같았고, 공부 잘하면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의사 하나는 법관이었는데, 아프리카의 법관이 되면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의사가 되기로 했다"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 기숙사에서 살게 됐다. 어릴 적 (다니던 교회의) 전도사님이었던 분이 교회를 개척하셨다는 소리를 들어서 그 교회에 갔다. 2시간 걸리는 거리라 가까운 교회에 갈까 생각도 했지만, '선교사 하겠다는 놈이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개척교회를 섬기는 것도 못하나' 생각이 들어 결혼하고 애 셋 낳을 때까지 그 교회를 다녔다"며 "개척교회를 섬기며 가장 감동이었던 기억은 목사님과 사모님이었다. 날마다 성실하게 기도하시고, 말씀 준비를 철저히 하시고, 말씀대로 살아내려고 하시고, 한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런 것들을 가까이 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제가 마다가스카르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분들이 모델이 되어 주셨다"고 했다.

이 선교사는 "의대를 다니는 동안 평생 동지를 만났다. '꿈이 뭐냐' 묻는 친구가 있었다. 그래서 '의료 선교사가 되어야만 한다'고 했더니 '의료 선교사 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랬다. 당시 저희 학년 140명 중 의료 선교사가 되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한 15명 정도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전 세계에 한국 의사로서 선교사가 된 사람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안 됐다. 그래서 '의료 선교의 꿈을 포기하기 쉬운데 서로 지켜 주자' 그렇게 해서 모임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또 저의 굉장히 귀중한 동지를 만났는데, 저의 아내다. 선교사로 나가고 싶은데 결혼을 하고 가는 게 좋을까 하나님께 여쭸고, 리처드 웜브란트 목사님의 책을 읽고는 '선교사 아내 되려면 적어도 이 정도 배짱은 있어야 되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제 아내는 결혼의 유일한 조건이 '하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남자'였다. 전 '남편을 사지로 보낼 수 있는 여자라면 선교사 아내 될 자격 있다' 이렇게 생각을 했다. 그래서 결혼을 했다. 우리 아내가 실제로 사지로 남편을 잘 보낸다"고 했다.

또 "하나님께서는 또 사람들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제가 선교사가 될 수 있도록 준비를 해 주셨다. 공중보건의를 하며 이동 진료를 한 번 갈 때마다 환자를 수백 명씩 봤다. 이후 수원 가족교육협회에서 모든 직업여성들의 성병 관리를 하고, 성병에 대한 강의를 정기적으로 해야 했다. 그래서 죽어라 공부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이동 진료할 때 성병 환자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시켰다"며 "또 저를 아프리카 보내신다고 세브란스 외과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파트를 다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응급의학과에서 외상 환자를 다룰 수 있었고, 차병원에서 산부인과 수술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왜 그런 일을 하고 그렇게 배우는지 잘 몰랐는데, 마다가스카르에서 환자를 치료하면서 알게 됐다. 만나는 환자들이 그때 그렇게 배우지 않았으면 치료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시기 위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준비시켜 주시고 훈련시켜 주시고, 선교를 직접 하신다. 제가 잘나서 한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에게 벌어진 이 모든 환경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무대라고 생각하시고, 여러분이 최선을 다해서 주인공처럼 연기하시기 바란다. 우리의 실체를 보여 주면 너무나 부끄러워서 보여 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우리가 보이는 게 아니고 옷 입은 예수가 보이는 것"고 했다.

그는 "2006년부터 여러 선교단체와 연합해서 오지에 가 텐트를 치고 약품과 수술 도구들을 챙기고 가서 환자를 치료해 주는 그런 일을 해 왔다"며 "하루는 촌장 어른이 도끼와 칼을 찬 청년들을 잔뜩 데리고 와서 '여기에 뭐 하러 왔냐' 물었다. 그들은 평생 한 번도 의사를 만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의사라는 직업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프면 100% 무당을 찾아갔다. 그래서 무당이라고 소개하니 촌장이 '웰컴'했다. 이 사람들한테는 우리가 정말 신기한 거였다. 구경거리가 났다"고 했다.

이어 "저희가 치료를 하고 사람들이 나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점차 사람들이 와서 진료를 받기 시작했다. 평생 약을 먹어 본 적 없으니 약에 너무나 잘 반응했다. 우리는 다친 환자들을 다 치료해 줬다. 그러다 원래 있던 무당들이 화가 나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온 무당이 눈과 간을 빼간다고 소문이 났고, 우리를 독살시키겠다는 소문을 공공연히 퍼뜨리고 다녔다. 연합하는 선교단체 중 한 디렉터가 '독살당할 위험이 있다'고, '다음 달 미션을 취소하자'고 했는데, '선교사가 안 가면 어떻게 선교를 하겠냐'고 하고 가 치료를 했다. 결국 무당들은 우리에게 잘못했다가 자기가 저주를 받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감히 독살하지 못했다"고 했다.

또 무당을 수술하게 된 일화를 전했다. 그는 "저희가 수술받은 사람에게 성경책을 주고 있었는데, 무당도 수술을 받았으니 성경책을 줬다. 수술하는 동안 의연했던 무당이 사시나무 떨듯 성경책을 보고, 갑자기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정기적으로 마을에 제사를 지내는데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물었다. '창조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는데 다른 신을 섬기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한참 있다가 알겠다고 하고 갔다. 몇 년 후 그 마을에 다시 갔는데, 무당이 '성경책이 있으면 더 달라'고 했다"며 "크리스천이 1명도 없던 베르루아라는 곳에 교회가 5개 생겼고, 10명 중에 3명이 예수 믿는다고 대답하는 마을이 되었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게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기억하라고 하신다. 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저의 인생에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말씀드렸다.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베드로처럼 투신할 필요도 있다. 우리의 환경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우리를 정금 같이 싸는 옷과 같다. 여러분이 그분들을 예수 그리스도라 생각하시고 일하시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줄로 믿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