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가 중요시해야 할 성경적 가치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물질관입니다. “물질을 어떻게 볼 것이며, 물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하는 한 개인의 물질관은 그 사람 개인의 신앙과 직결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성경은 “탐심은 곧, 우상숭배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하나님과 물질, 둘 사이에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일은 단순히 “하나님께 물질을 바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느냐? 물질을 더 사랑하느냐? 하나님을 더 신뢰하느냐? 물질의 더 신뢰하느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느냐? 자신의 것,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병고침 받았어도, 감사 예물을 드리지 않은 히스기야왕과 아홉 문둥병자들 책망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고, 소득의 십 분의 일을 드리지 않은 일을 하나님의 것을 빼앗는 일로 심각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20년 전, 세리토스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당시, 학업과 사역을 병행하던 때였는데, 평일 날에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도서관에서 신문을 읽고, 성경책과 신앙 서적을 읽는 것이 하루 일과였습니다. 어느 날, 어떤 백인 할아버지 한 분이 도서관 문이 열리자마자, 여러 신문이 진열되어 있는 진열대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열대에서 저는 중앙일보를 집었고, 그분은 영어로 된, 세 종류의 신문을 집으셨습니다. 그리고 30분이 지날 무렵, 어떤 필리핀계 할아버지 한 분이 신문 신문 진열대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읽는 신문을 찾다가 백인 할아버지 앞에 높여 있는 것을 확인하시고, 백인 할아버지께 다음과 같은 양해를 구하셨습니다. “당신이 다른 신문을 볼 동안에 금방 보고 돌려드리면 안되나요?”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백인 할아버지가 “내가 먼저 와서 골라 집어 들었으니 이것은 분명히 내거요,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빌려 줄 마음이 전혀 없으니, get away from me 썩 물러가요”라고 하셨습니다. 그 장면을 보는 그 순간 저는 “어쩌면, 이 모습이 하나님 앞에 비추인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서관에 진열된 신문들은 사실, 백인 할아버지의 소유도, 필리핀계 할아버지의 소유도, 하다 못해 저의 소유도 아닙니다. 이 모두가 세리토스 그리고 도서관 소유입니다. 그런데, 백인 할아버지가 마치 그 신문이 자신의 것인 냥 행동하였으니, 얼마나 부끄럽고 황당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믿는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내가 한 것이 없고,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분의 은혜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인색하거나, 드리기를 싫어하고 기피합니다.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일입니까?
주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시 세상을 다스리는 주관자였던, 로마 시져 황제에게 마땅히 세금을 바치는 것처럼, “하나님께 드릴 것을 마땅히 하나님께 드리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려 들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인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드리기를 기뻐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