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청년 시절에는 농구하기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제 손가락이 아주 좋아졌지만, 한창 농구를 할 때는 성한 손가락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경기 중 다친 손가락에 늘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습니다. 공원에서 농구하다가 해가 지면, 동전을 넣어 야간 경기도 할 수 있는 구장을 찾아서 계속하다가 밤 12시 넘어 더 이상 불을 켤 수 없을 때는 경기장을 향하여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고 새벽 한두 시까지 뛰다가, 아쉽게 끝날 때가 많았습니다.
이 버릇은 신학교 가서도 비슷했습니다. 방과 후 학교 뒷마당에 있는 야외 농구장에서 운동하기를 좋아하는 신학생들과 농구하기가 일쑤였습니다. 다들 가정이 있는 학생들이라, 아내들을 학교 뒷마당으로 가끔 불러 남편들을 응원하게 하고, 경기 후에는 같이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는 것이 어려운 신학교 생활에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위로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평상시에는 농구 실력이 그저 그런데, 자기 아내가 나와 응원을 하면 실력이 확연히 좋아지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내들이 나와 농구장 주위 잔디에 앉아 응원을 시작하면 게임 내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내들이 치어리더처럼 응원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경기에는 별 관심이 없고, 아내들도 서로 대화를 나누며 친교 하기에 바쁘지만, 남편 되는 신학생들은 아내들의 존재감에 농구 실력이 느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away 경기보다 home 경기에서 승률이 더 높은 것도 그 이유일 것입니다.
결국 분석의 결과는 사랑하는 대상이 지켜보는 현장에서는 본래 실력에 잠재력까지도 100% 발휘되어 평균보다 훨씬 경기를 더 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지켜보느냐’에 따라서 나의 실력이 차이가 난다면 응원석에 부르고 싶은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는 우리 삶의 현장은 결코 녹록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판 보다는 따뜻한 격려의 한마디가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가정과 교회는 냉소보다는 사랑하는 자들의 응원이 절박한 공동체입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우리의 자녀들과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응원석에서 자기들을 보고 있는 사람이 ‘사랑의 대상’이라는 확신입니다.
여러분의 응원석에는 누가 앉아 있기를 원하십니까? 누가 여러분의 경기를 참관하기를 기대하십니까? 분명한 것은 응원석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아도 우리 교회가 응원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응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파이팅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