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1일 저녁 7시 30분 주순영 선교사 초청 찬양간증집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시와 찬미"라는 제목으로 주님의 영광교회 비전센터에서 개최됐다. 주순영 선교사는 16살의 나이에 호위사령부 협주단 배우로 발탁되어 김일성 주석의 부인,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 역을 맡으며 1호 공훈배우로 활동했으나 김일성 사후 북한이 경제 위기에 처했을 때 외국 투자자 유치를 위해 2박 3일간 중국을 방문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탈북자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선교사가 되었다.
주 선교사의 미주성회는 지난 14일(금)과 15일(일) 뉴욕 간증집회에 이어 21일(금)부터 30일(일)까지 총 7회에 걸쳐 진행된다. LA 첫번째 일정이던 지난 21일 집회에서 주 선교사는 호위사령부 배우로 발탁되어 탈북을 하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전하며 "반갑습니다", "휘파람" 등 북한 가요를 찬양으로 번안해 부르며 간증집회를 인도했다.
"저는 북한 에서 태어나서 16살에 평양으로 올라왔다. 대한민국에 들어와서 보니, 스타가 되는 것을 스스로 준비한다. 그런데 북한은 당에서 내려와서 그들을 선택한다. 가정생활도 잘 해야하고, 부모님과의 예절 교육, 사생활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 1년후에 데려가는데 군복을 입혀서 데려간다. 여성들이 군복을 입는 것이 로망이었다. 기차에 오르고 당에서 배급해 준 빵을 먹고 잠이 들었는데 새벽이 되어서, '지금 열차는 혁명의 수도 평양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라는 멘트에 잠에서 깼다. 평양은 누구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고 승인번호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평양에 들어가게 되자 얼마나 격양되어 있겠는가. 침대에 있던 아이들이 내려와서 깡충깡충 뛰었다."
호위청사 안으로 들어간 주 선교사는 김정숙 역할 배우로 발탁되어 김일성종합대학, 김일성정치대학, 군사대학 등 5개 대학의 강사들로부터 정치ㆍ경제ㆍ교육ㆍ문화ㆍ군사ㆍ산업ㆍ예술 등 모든 분야의 김일성 앞에서 첫 공연을 했다. 이 공연을 본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숙 동무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는 칭찬을 받으며 공훈 배우로 행복을 누렸다.
하나님을 만난 후 주 선교사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마침내 중국 땅으로 우리를 인도해주셨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 고마워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는 지 그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백성은 나를 위해서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때는 김일성, 김정일이 하나님인 줄 알고 청춘과 심장을 바쳐 그들을 찬양하는 것이 저희들의 사명인 줄 알았습니다. 남은 생을 하나님만 찬양하는 당신의 참된 딸이 되겠습니다."
이어서 김일성 사망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며, 김일성 신격화의 실상을 증언했다.
"온 나라 인민들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기다렸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텔레비전 앞에 앉힐까? 혹시 미국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다른 때는 연분홍 저고리를 입고 나오던 앵커가 검은 저고리를 입고 나왔다. 앵커는, '잠시 중대한 발표가 있겠습니다. 김일성 동지께서는 심장의 거동을 멈췄습니다.' 전국적으로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38명이 심장 마비로 죽었다."
김일성 사후 북한에서는 경제 위기가 찾아 왔고 대기근과 아사가 진행되었다. 당에서는, 국가고위부, 사회안정부, 중앙기관 식량을 자체 해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며 군량미 창고가 모두 비었다. 나라가 식량을 공급하지 못했고 외국에 출장을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고 망명을 했다.
"꽃제비가 된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았고 국경지대에 도달하니, 중국에 있는 친척의 도움을 받을 까 하여 중국 쪽을 간절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왜가리 부대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밤이면, 사람들이 죽으면 죽으리라고 두만강을 건너간다. 그들의 사체가 강물에 떠내려와, 쌓여 있고 새들과 짐승들이 그것을 파먹는다. 강둑에서 자던 사람들이 매일 100명씩 죽어 나간다. 그러면 인원이 줄어들어야 하는데 전국에서 계속 국경지대쪽으로 와서, 인원이 계속 채워진다."
북한의 매체를 통해 남한에 대해 접했기 때문에, 당시 주 선교사는 남한이 "미국의 군화발 밑에서 신음하는 줄 알았다."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여주는 남한의 모습은 사실 노숙자와 재계발 아파트를 찍은 것이었다. 서울역에서 노숙자들이 생수통, 코카콜라, 맥주캔을 옆에 놓고 자고 있었다. 북한 당간부들이나 먹을 수 있는 것을 노숙자들이 먹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나무로 덮혀 있는 중국의 산을 보면서 "북한의 산은 벌거숭이 산인데 중국의 산은 어떻게 나무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북한 땅을 뒤덮은 재난과 기근이 하나님의 사람의 3대 친족을 멸하고, 평양의 첫번째 교회 널다리 교회, 장대현 교회가 있던 자리에 교회를 부수고 김일성 동상을 세워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북한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3대 친족을 멸했다. 하나님의 사람을 멸족시킨 북한은 저주의 땅으로 변하게 되었다. 철조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떻게 그런 차이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평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린 장대현 교회가 있었고, 회개와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던 시대의 믿음의 선조들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북한이 80년대까지 지탱될 수 있었으나, 장대현 교회를 부수고 그곳에 김일성 동상이 세워지고, 교회들을 없앴다."
주순영 선교사의 탈북은 뜻하지 않게 이뤄졌다. 북한 경제 위기가 지속되자, 당은 외국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 그를 2박 3일 일정으로 중국 연변에 파견했고, 그 과정 가운데 주 선교사는 예기치 못한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하루 아침에 탈북자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탈북의 길로 갈 수밖에 없도록 인도한 분은 하나님이셨다고 간증한다.
주 선교사는 호텔 식당에서 중국의 투자자들을 만났고, 그가 배우인 것을 알아본 사람들의 요청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가 노래를 하자 사람들이 크게 호응하며 그에게 팁을 주었다. 노래를 부른 대가로 처음으로 받아 본 돈이었다. 주순영 선교사는 왜 돈을 주는 지 의아해서 물었고, "이것이 자본주의 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노력의 대가를 돈으로 줍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이 돈을 장군님께 드리자"는 생각에 더욱 신이 나서 노래를 했다.
그 손님들 가운데 한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있었고, 그 분들로부터 주 선교사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처음으로 듣게 된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는데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래서 제가, 우리 수령님은 왜 못살아나셨을까 의아했다. 김일성이 죽은 날이 7월 5일이다. 3일 동안 눕혀 놓았다. 하늘이이 내신 분이기 때문에 혹시 살아나지 않을까 해서 3일동안 기다렸다. 북조선에서는 김일성이 죽었을 때 하늘이 내신 분이 돌아가셔서 하늘이 저렇게 통곡한다고 해서 그 비를 통곡비라고 했다. 그때, 저에게 그 말 소리가 들려왔다. '그 비는 통곡비가 아니라 7-8월 장마비였다.'"
"그분들이 지붕 꼭데기에 십자가가 있는 곳에 가서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다. 노래 번 것으로 돈을 번 것도 신기한데 10분의 1을 드리면 더 준다고 했다."
주 선교사는 그 선교사들을 통해 처음으로 성경을 접했고, 지퍼가 달린 성경 책을 돈이 들어 있는 가방으로 오해했다.
"포장을 뜯고 나니 성경이었다. 제가 성경이라는 말도 안들어봤다. 저희가 중국에 갈 때 가방을 가져 간다. 그 가방과 같은 크기여서 돈 가방이라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두꺼울까. 북조선 사람들 만나면 돈을 준다고 하던데 돈이 아닐까? 책입니다. 왜 책에 지퍼를 달았을까. 성경을 열었더니 주기도문, 사도신경이 써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남한에서, 당의 유일적령도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을 가져다가 검은 사상, 반동사상을 만들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첫날 공연에 2천 7백 위안을 팁으로 받은 그는 다음날 아침 첫 십일조를 바치기 위해 아무 곳이나 지붕 꼭데기에 십자가가 있는 곳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문을 열고 나오자, '하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십일조를 바치러 왔습니다. 하나님께 데려다 주십시오.'라고 했다. '아버이를 따라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구나. 하나님이 늙었을까 젊었을까. 수령님을 신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수령님 보다 늙었을까 젊었을까.'가 너무 궁금했다. 나무 함이 있는데 여기에 넣으라 했다."
하나님을 직접 찾아 뵙고 드리려 했으나, 교회를 지키던 분은 '여기에 넣어도 보고 계신다'고 했고, 주 선교사는 어디서 보고 계신 지 궁금해 방을 빙 둘러 본 후, '처음 뵙겠습니다. 어디서 보고 계신지 모르지만, 이 돈을 받으시고 어제 받은 것 보다 더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한 후 나무 함에 십일조를 넣었다.
그 다음날은 4천 8백 위안을 벌었고, '하나님께 조금 더 달라고 기도할 걸'이란 후회가 들었다. 그리고 십자가가 있는 집에 차를 세우고 두번째 십일조를 드리며 기도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진짜로 두 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북조선 사람들은 자고 깨어나면 1백명 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1백배 만배 주십시오.'
주 선교사에게 중국 시장의 풍족한 모습에도 충격을 받았다. 조선족 가이드의 '연변땅에 십자가가 세워진 때부터 잘 살기 시작했습니다'라는 설명에, 그는 '북조선 사람들이 연변에 드나들었는데 십자가를 세우면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이것을 빨리 당에 보고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세번째 날, 그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 로비에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식당 안에 빈 자리가 없었다. 노래를 부를 때 마다 팁을 받아, 총 3만 6천 위안을 벌었다. 그러나 다음날 북한으로 돌아갈 일정이기 때문에 십일조를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십일조를 바쳐라'는 음성이 계속 들렸다. 하나님의 음성이 뭔지 알지 못했던 주 선교사는 호텔 라디오에서 십일조 방송을 나오나 보다라고 생각했으나, 다음날 지원물자를 실은 트럭과 승용차로 북으로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도 그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도저히 십자가를 지나가지 못하고 마지막 십일조를 바쳤다.
세관에 검사를 모두 마치고 투자자들과 인사와 악수를 나누고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는 순간, 누군가 그를 불렀다. 그리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북조선에서 선생님이 도착하자 마자 체포하자고 체포조를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때 주 선교사의 귀에 빨리 화장실에 가라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에 들어간 선교사는 성경책을 주신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대로 기도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기도하라. 상황을 보고 하고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저를 북조선 사람들이 체포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딸아 북조선으로 가면 안된다. 중국으로 돌아가라."
그는 재빨리 택시에 몸을 싣고 연길로 향했다. 연길 시내에 도착했지만 갈 대가 없었다. 십자가가 있는 집에 들어섰는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너무나 울컥했다. 맨 앞자리에 가서 앉아서,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저는 조국으로 가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딸에게 3일 안에 돌아간다고 약속했습니다. 제가 못가면 제가 어떻게 무사하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라고 기도하자, '사랑하는 딸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지켜주겠다.'는 음성을 들었다.
주 선교사는 첫번째 집회의 간증을 마치며, "사람의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발걸음을 인도하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욥의 고백처럼 저는 그때 광야에 던져졌다. 그때 부터의 삶은 말할 수 없었다. 십일조로 부풀렸던 돈가방의 돈으로 중국에서의 기간을 지켜주셨고, 그 돈이 중국에서 정착할 수 있는 정착금이었다. 중국에서 체포되고 북송되면서 죽어가는 북조선 사람들의 굶주림과 아픔을 그때부터 하나 하나 공부하고 체험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북한선교를 돕고 있는 장대현 은혜교회의 김정현 목사는 주 선교사를 향한 음해 세력이 있음을 전하며 기도를 부탁했고, 주님의 영광교회의 신승훈 목사는 내몽고에서 만난 탈북자를 한국에 데려오기 위해 법무부를 찾아갔지만, 북한과의 관계를 이유로 거절되었던 경험을 나누며, 탈북자들을 위한 기도를 이끌었다.
주 선교사 간증집회의 나머지 일정은 다음과 같다. 28일(금) 오후 8:30 GBC 올림픽 장로교회(담임 이수호 목사) / 7월 29일(토) 오전 6시 - 나성영락교회(담임 박은성 목사) / 7월 30일(일) 오전 8시, 오전 11시 한마음제자교회 (담임 곽부환 목사) /문의: 기독일보 (213) 739 0403, (213) 434 1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