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교회가 세워지기까지는 폭정을 일삼는 관가의 핍박과 개인의 집요한 방해와 괴롭힘이 뒤따랐다. 음란한 도성이며 폭력배가 많았던 평양에 십자가가 세워지는 과정에 이를 방해하며 폭력적인 방법으로 선교사들을 괴롭힌 인물 중에 대표적으로 두 명이 있었다. 관리로는 그 당시 평양 감사인 민병석으로 그의 횡포가 매우 극심하였다. 그는 민비 일가로서 그의 영향력을 대단하였기에 자신의 관리 역내에 외국인들이 들어와 선교 활동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선교사들의 사역을 노골적으로 방해하였다.

그는 장로교의 마펫 선교사와 감리교의 홀 선교사와 그의 조수인 한석진과 김창식을 관가에 잡아다가 매를 치고 옥에 가두며 처형하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에게 집을 판 사람도 잡아다가 가두었고 예수를 믿는 소수의 기독교인까지도 옥에 넣고 매를 치며 목에 칼을 채웠다. 그는 예수를 저주하고 부인하면 석방해 준다며 겁박과 회유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직자가 아닌 개인으로서 마펫 선교사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방해한 사람은 이기풍이였습니다. 그는 평양 성내의 장날에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마펫 선교사가 찬양과 전도를 할 때에 그에게 돌을 던져 얼굴에 피가 낭자하게 만든 난폭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이기풍은 평양의 유명한 깡패 노릇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후에 그가 거듭나 한국 최초의 7인 목사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놀라운 변화였다.

그는 1868년 평양 출신으로 양반 가문이었고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어서 여섯 살 때에 사서삼경을 외우고 12살 때에는 백일장 장원에 뽑힐 정도로 신동이였다. 그러나 성년이 되어 관직도 얻었지만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혈기가 대단하였다. 평양 성내에 코가 큰 서양인이 나타나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이기풍은 마펫 선교사를 따라다니며 괴롭혔고 그의 집에 돌팔매질을 하였다. 평양 장대현 교회를 건축 중이었을 때에는 그 현장에 가서 교회 건물과 시설물을 때려 부수며 파괴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꿈에 마펫 선교사가 자신이 던진 돌에 맞아 쓰러져서 피를 흘리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주님의 음성이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괴롭히느냐? 너는 나의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라는 음성을 들었다. 이 이야기는 그의 딸 이사럐 권사가 간증한 것이다.

그는 괴로움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식욕도 잃게 되자,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마펫을 직접 찾아가서 용서를 빌었다. 그 후 마펫 선교사는 이기풍이가 병상에 눕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가서 위로와 병 치료에 도움을 주고 오기도 하였다. 이처럼 마펫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그를 미워하지 않고 긍휼한 마음을 품고 그를 용서하며 사랑하였다. 이기풍은 원산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스왈론(Swallen) 선교사를 만나게 되어 1896년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전적으로 그 선교사를 섬기며 밥을 해 주며 선교사의 조수가 되어 전도하는 일에 힘썼다. 그는 선교사를 따라다니며 함경도 지역까지 원정 전도를 하기도 하였다.

1899년에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해가 뜨기만 하면 평양 성내를 다니며 전도하려 다니는 일이 그의 일과가 되었고 평양 장대현교회를 열심히 섬기자, 마펫 선교사는 그를 장로로 임직을 주어 그 교회의 기둥이 되게 하였다. 1903년에는 마펫 선교사의 권면을 받아 25살이라는 최연소 나이로 평양 신학교에도 입학을 하였다. 그 당시에 같은 신학을 공부한 길선주를 비롯한 한석진 등은 나이가 40대에서 50대였다. 그는 1907년 6월 10일 장대현 교회의 뜰에서 역사적인 제 1회 평양신학교 졸업생으로 한석진과 길선주와 서경조 등과 같이 졸업을 하고, 그해 9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서 그는 1908년 2월 평양 독노회로부터 최초의 해외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 당시 제주도는 유배지나 다름없었고 우상과 미신이 가장 극심한 섬이었는데, 그는 아무도 가지 않는 오지이며 험지인 제주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웠다. 그곳에서 지난 날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을 괴롭혔던 그가 13년 동안 제주도에서 주민들에게 모진 핍박과 배척을 받아가며 제주도에 '성내교회'를 비롯해 8개 교회를 개척하여 그곳에 십자가를 세웠다. 그로 인해 제주도 주민들은 우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후에 전라도 광주 제일교회와 순천 중앙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되어 교회를 섬겼다.

이기풍 목사는 그 당시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굴하지 않고 거부하다 감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하였고 그 후유증으로 1942년에 순교를 당하였다. 그는 한국 초대교회의 최초의 목사였고 최초의 해외 선교사였으며 사도 바울 같은 위대한 사역자였다. 이기풍은 최초 7인 목사로서 평양 출신이었지만, 그의 사역지를 평양이 아닌 가장 험지인 제주도를 자신의 사역지로 삼으므로 최초의 이남 지역의 목회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를 위대한 사역자로 택하고 양육한 사람은 바로 마펫 선교사였다. 마펫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핍박하였던 사울을 택하여 그를 위대한 사도로 택하시고 초대교회의 최초로 해외 선교사로 파송했던 것 같이, 마펫도 자신을 핍박했던 그를 평양 신학교로 보내고 목사로 양육한 다음 해외 선교사로 세웠다. 마펫은 초대교회의 교부 같은 위대한 한국교회의 초대 파운더(Founder)였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