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 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태복음 15:2-3)".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태복음 15:8-9)".
마태복음 15장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세속적 인본주의로 왜곡된 율법을 비판하십니다. 계명의 본래 취지는 외형보다 심령의 갱생과 청결이 우선시된다는 말씀입니다.
필자 역시 어린 시절부터 식사 전이나 바깥에 나갔다 집에 들어왔을 때, 맨 먼저 하는 일은 철저한 손 씻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이 손 씻기 습관이 몸에 익었습니다. 코로나 시대인 지금도 손 씻는 일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철저히 지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 역시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단순히 위생을 철저히 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자신 안에 더러운 것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종교적 형식의 율례였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전통을 그토록 중시하면서도 하나님의 계명 그 자체는 지키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더럽다고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오히려 "너희 안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에 주의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더러움과 깨끗함, 과연 무엇이 더러운 것이고 무엇이 깨끗한 것일까요? 더러움과 깨끗함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리새인들은 깨끗함을 위생과 연결시키고, 이를 다시 종교적 정결 예법으로 확대시켰습니다. 조상들이 하던 방식에 젖어 있었지만, 그들 나름의 합리적이고 이유 있는 생각이요 논리였습니다. 사실 이것만 가지고 무어라 탓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이미 위생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 정(淨)과 부정(不淨)을 논하는 바리새인의 태도에서, 예수님께서는 일종의 폐단을 발견하십니다.
다시 말해 종교적으로 고착되어 버린 정(淨)과 부정(不淨)의 문제는 이제 또 다른 사회적 계층을 만들고 분리시키는 기준으로 변질됐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더러움을 기피하는 현상은 물건에서 사람에게까지 확대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헐벗은 사람 또는 억눌린 자와 죄인에게 접근하는 것조차 불결한 일로 간주해 버렸고,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외형적으로만 평가하는 더러움, 또 다른 사회적 소외의 요인으로 변질된 더러움.... 이렇게 된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정(淨)과 부정(不淨)의 기준을 새롭게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움과 깨끗함을 나누는 기준을 사람 안으로 끌고 들어오셨습니다. 더러움은 더 이상 밖으로부터 오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내부에서 오는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저 입술로만 주님을 공경한다든지, 입술로만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 한다든지, 보여주기식 태도로는 늘 위선과 고집, 그리고 진실이 없는 거짓 왕 노릇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셨을 때,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리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강력하게 외치셨습니다. 마귀의 권세에서도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승리하시는 그 모습은 실로 아름답습니다.
문제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들어오느냐가 아니라, 들어오는 그것을 어떻게 변형시키느냐에 주안점을 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삶으로 친히 본을 보여주신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을 향한 것은 오롯이 증오와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사랑으로 여과시키고 용서라는 꽃을 피우셨던 것입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변화시키시고, 분노를 용서로 바꾸셨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아가페 사랑의 연금술인가요! 사랑은 이렇게 모든 것을 수용하고 용해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인간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간을 더럽히지 못합니다. 더럽힐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롯이 인간의 육체뿐일 것입니다. 온갖 죄의 더러움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교회나 노회, 총회를 보면 안타까움뿐입니다. 더러운 것들이 교회 안으로, 노회 안으로, 그리고 총회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별력을 잃고 세상 연락에 함몰돼 그저 입술로만 믿음을 지키는 '행함 없는 수고'뿐입니다.
분별력을 잃을 정도의 난잡함으로 비신앙인들이 보기에도 심히 민망할 정도의 위험에 처해 있는 현실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무겁고 고단해집니다.
이곳에 예수님께서 한 번 더 오셔서,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인들에게 회복의 모범을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신앙인들의 신실한 회개를 통해, 천국을 차지하는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이나 억눌린 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며, 심히 위험한 차별을 삼가고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요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입으로 나오는 모든 것들을 선하게 변형하는 이 땅에 크리스천들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 |
이효준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