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말하건대, 선생님 일생은 하나님의 은총
한신대 40년간 교편, 황무지에 광야의 길 개척
동서 아우르는, 한국신학계 드문 방대한 저술
교회사학계 선구자, 기독교사상과 신학 체계화
에큐메니칼·복음주의 통전적 결합, 새 장 열어
강의실에선 엄격하고, 밖에선 자상한 교육자
70세에 아프리카 선교, 업적 이루 말할 수 없어
믿음의 유업과 학문적 유산, 더 발전해나갈 것
한신대학교 김주한 신대원장이 지난 15일 101세의 일기로 별세한 故 혜암(惠岩) 이장식 박사(한신대 명예교수, 혜암신학연구소 초대소장)에 대한 추모사를 발표하고 "선생님께서 남기신 위대한 믿음의 유업, 학문적인 유산은 수많은 제자들을 통해 더욱 발전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김 신대원장은 "감히 말하건대 선생님의 일생은 참으로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요 사랑과 진리의 사도로서 예수님의 제자직의 사명을 최선 다해 감당해 온 역사였다"며 "대구의 계성학교, 서울의 한국신학대학, 그리고 캐나다와 미국의 유수한 신학대학에서 학문을 연마하도록 인도하셨다. 선생님을 신학자이자 교육자로, 목회자이자 선교사로 사용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였다"고 했다.
이어 "선생님은 신학자요 교육자로서 한신대학교에서 40여 년의 세월 동안 가르치셨다. 번듯한 신학 교재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던 시절, 선생님은 황무지와 같은 광야에 길을 개척하시는 심정으로 수많은 저서들을 집필하셨다"며 "선생님의 연구 영역은 동서양을 아우르는, 그야말로 한국 신학계에서는 보기 드문 방대한 저술 작업이었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많은 저서들이 오늘도 여전히 여러 신학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신학자로서 선생님은 실로 한국 신학계의 거목이셨다"며 "특히 선생님은 교회사학계의 선구자이셨고 기독교사상과 신학의 역사를 종합하고 체계화시키는 데 열정을 쏟으셨다. 그리하여 선생님의 신학은 에큐메니칼 진영의 신학적 자유성과 복음주의 진영의 교리적 신학체계를 통전적으로 결합시켜 역사신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전했다.
또 학창시절의 기억에 대해 "강의실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을 향해 언제나 정숙하고 단정한 자세로 학업에 열중할 것을 강조하셨다. 학생들이 수업시간 늦거나 강의에 집중하지 않을 때에는 불호령을 내리셨다"며 "(지금도 회자되는 일화로) 채플 시간이 다 되었음에도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딴청부리는 학생들을 무릎 꿇고 두 손 번쩍 들게 하셨던 일이 있다. 그만큼 선생님은 한신 신학의 주춧돌인 '학문과 경건'의 두 수레바퀴를 신학교육 현장에서 구현하시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셨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선생님은 강의실 밖에서는 한없이 자상하시고 인자하신 교육자이셨다. 제가 대학원 시절 교회사분야 논문을 쓰면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게 된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며 "선생님의 논문 지도방식은 독특하였다. 선생님은 논문 각 장별로 지도하시면서 미비한 점이 있을 경우 다음 장을 쓰지 못하게 하셨다. 매우 어렵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선생님의 엄격한 지도와 훈육은 이후 저의 학업 여정에 큰 자산이 되었다"고 전했다.
특히 "선생님은 70세 때 아프리카 케냐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15여 년을 봉사하셨다. 선교사로 떠나시겠다는 선생님의 결정을 듣고 많은 사람들은 놀랐다. 보통 인생의 노년을 평안하게 보낼 준비를 하는 시기에 선생님의 시선은 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며 "케냐에서 박동근 사모님과 함께 그곳 신학교에서 목회자 양성을 위해 온 열정을 쏟으셨던 일과 케냐와 인근 나라의 여러 지역들을 순회하며 선교협력을 도모하신 일, 장학금을 조성하고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설립하신 일, 교회당을 건축하여 봉헌하신 일 등등 선교 현지에서 이루신 업적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선생님은 이 세상에서 진리를 향한 순례의 여정을 마치시고 영원한 생명과 평화와 안식이 있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며 "이 세상 수고를 다하시고 하나님 품에 안기셨으니 그곳에서 편히 안식하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고 전했다. 다음은 추모사 전문.
존경하는 스승 이장식 선생님,
불민(不敏)한 제자가 선생님 영정 앞에서 조사를 올립니다. 감히 말하건대 선생님의 일생은 참으로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요 사랑과 진리의 사도로서 예수님의 제자직의 사명을 최선 다해 감당해 온 역사였습니다. 일제강점기 경남 진해 덕산 고을에서 태어난 선생님은 그야말로 밭에 묻힌 보석이요 진주이셨습니다.
인간의 혼돈을 섭리의 역사로 이끌어 가시는 주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아래 서 있던 나다나엘을 먼저 알아보시고 그를 불러 제자로 삼으셨던 것처럼, 선생님을 눈여겨보시고 때가 되어 부르셔서 대구의 계성학교, 서울의 한국신학대학, 그리고 캐나다와 미국의 유수한 신학대학에서 학문을 연마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 모든 여정은 밭에 묻힌 원석을 캐내어 보석처럼 빛나게 다듬고 빚으셔서 선생님을 신학자이자 교육자로, 목회자이자 선교사로 사용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였습니다.
선생님은 신학자요 교육자로서 한신대학교에서 40여 년의 세월 동안 가르치셨습니다. 반듯한 신학 교재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던 시절, 선생님은 황무지와 같은 광야에 길을 개척하시는 심정으로 수많은 저서들을 집필하셨습니다. 《기독교사상사》, 《기독교신조사》, 《기독교와 국가》, 《현대기독교사조》, 《젊은 어거스틴》, 《교부 오리게네스》등 서양기독교사상에서부터 《아시아고대기독교사》, 《세계교회사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선생님의 연구 영역은 동서양을 아우르는 그야말로 한국 신학계에서는 보기 드문 방대한 저술 작업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저서들이 오늘도 여전히 여러 신학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신학자로서 선생님은 실로 한국 신학계의 거목이셨습니다. 특히 선생님은 교회사학계의 선구자이셨고 기독교사상과 신학의 역사를 종합하고 체계화시키는 데 열정을 쏟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선생님의 신학은 에큐메니칼 진영의 신학적 자유성과 복음주의 진영의 교리적 신학체계를 통전적으로 결합시켜 역사신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강의실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을 향해 언제나 정숙하고 단정한 자세로 학업에 열중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학생들이 수업시간 늦거나 강의에 집중하지 않을 때에는 불호령을 내리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대학원장으로 봉직하실 때 있었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곤 합니다. 채플 시간이 다 되었음에도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딴청부리는 학생들을 무릎 꿇고 두 손 번쩍 들게 하셨던 일말입니다. 그만큼 선생님은 한신 신학의 주춧돌인 '학문과 경건'의 두 수레바퀴를 신학교육 현장에서 구현하시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강의실 밖에서는 한없이 자상하시고 인자하신 교육자이셨습니다. 제가 대학원 시절 교회사분야 논문을 쓰면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게 된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논문 지도방식은 독특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논문 각 장별로 지도하시면서 미비한 점이 있을 경우 다음 장을 쓰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매우 어렵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선생님의 엄격한 지도와 훈육은 이후 저의 학업 여정에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4년 전 제가 신학대학원장으로 취임할 때 선생님께서 불편하신 몸이셨지만 친히 참석하셔서 축도를 해 주시며 하셨던 말씀은 지금도 저의 가슴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때 선생님은 '종합대학교 체제 아래에서 한신 신학교육이 약화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신학교육과 신앙교육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한신 신학교육과 기장교회의 미래 비전을 향한 선생님의 관심과 애정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2년 전 선생님께서 그토록 존경하고 사모하셨던 만우 송창근 목사님의 유언 비석을 수유리교정에 세울 계획을 말씀드렸을 때 선생님은 그 누구보다도 기뻐하셨습니다. 기념비 제막식 날 선생님은 직접 참석하셔서 축사를 하시며 만우 송창근 목사의 복음주의적 경건교육의 중요성을 힘주어 강조하셨습니다.
선생님의 후진 양성을 위한 노력은 정년퇴임 이후에도 한신과 여러 신학대학 강의를 통해 계속 이어졌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인재육성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셨습니다. 사재를 정리하여 한신대에 장학기금을 조성하시고 후원하신 일은 학교와 제자들을 위한 선생님의 깊은 애정의 발로였습니다.
신학자요 교육자로서 평생을 헌신하셨던 선생님 인생 여정 앞에는 목회자요 선교사로서 새로운 삶의 장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70세 때 아프리카 케냐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15여 년을 봉사하셨습니다. 선교사로 떠나시겠다는 선생님의 결정을 듣고 많은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보통 인생의 노년을 평안하게 보낼 준비를 하는 시기에 선생님의 시선은 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케냐에서 박동근 사모님과 함께 그곳 신학교에서 목회자 양성을 위해 온 열정을 쏟으셨던 일과 케냐와 인근 나라의 여러 지역들을 순회하며 선교협력을 도모하신 일, 장학금을 조성하고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설립하신 일, 교회당을 건축하여 봉헌하신 일 등등 선교현지에서 이루신 업적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선생님은 이 모든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자서전 《창파에 배우 띄우고》에서 당신 인생의 여정을 망망한 바다를 헤쳐 항해한 작은 배에 비유하셨습니다. 이 책에서 선생님은 욥기 23장 8-10절의 말씀에 의거하여 "하나님께서 평생 나를 가까이하시고 내가 가는 길을 인도해 주신 것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증인"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남기신 위대한 믿음의 유업은 선생님의 사랑한 자녀들과 손주들을 통해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또한 선생님의 학문적인 유산은 수많은 제자들을 통해 더욱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존경했던 신학자 어거스틴은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편안하지 않습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제 선생님은 이 세상에서 진리를 향한 순례의 여정을 마치시고 영원한 생명과 평화와 안식이 있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선생님, 이 세상 수고를 다하시고 하나님 품에 안기셨으니 그곳에서 편히 안식하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2021년 9월 17일
불민한 제자 김주한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