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민수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Photo : 기독일보) 심민수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세상 지도자는 권력을 필요로 한다. 권력이 주어져야 주어진 책무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권력의 문제를 국가 건설에 중심 주제로 전개한 고전적인 작품들이 있다. 하버드 대가 선정한 인문고전 중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그 중에 한 대표적인 책이다. 세계의 유수한 정치가들과 사상가들의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 이 작품은 실제로 그 내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군주론』은 역사에 많은 영웅호걸들에게 영향을 주고 세상의 정치가들의 정신세계에 깊은 인상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주론』의 저자인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는 이탈리아의 외교관이자 정치철학자의 입장에서 당시 피렌체의 권력자인 로렌조 메리치에게 1513년 이 책을 헌정 하였다. 이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글재주를 선보임으로써 메디치에게 발탁되기 위함이었다. 아쉽게도 그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했고 그는 불우하게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였다. 실제로 이 책은 그가 죽은 후에 출판되었고 한동안 금서 목록에 올려져 있기도 하였다. 16세기 당시 로마카톨릭의 대표적인 성직자들인 영국의 추기경인 레지널드 폴(Reginald Pole)과 포르투갈의 주교인 제로니모 오소리오(Jeronymo Osorio) 그리고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이자 주교였던 엠브로기오 카테리노 폴리티(Ambrogio Caterino Politi)는 『군주론』을 심하게 악평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에게) 필요할 때는 주저없이 사악해지라"고 제안한다.  이와 유사한 문장이 책의 전체 내용에 폭넓게 나타난다. 이는 그가 믿었던 군주의 통치술의 전제가 매우 현실주의적이고 상황주의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20세기 미국 정치철학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 1899-1973)는 마키아벨리를 이렇게 평한 바 있다. "마키아벨리는 크세노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으로부터 도덕적 가르침을 배우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에 의해 모든 것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는 지평을 넓히는 대신 오히려 폭을 좁혔다. 마키아벨리는 악(惡)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Strauss, 1958)." 스트라우스의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후대의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그만큼 『군주론』을 비롯한 그의 또 다른 저작에 담긴 통치술에 관한 주장이 풍성한 통찰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이에 따른 다양한 해석은 사실상 마키아벨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진행되어 왔다. 고전적 텍스트를 통해 논의거리를 찾기 좋아하는 학자들에 의해 마키아벨리의 다양한 얼굴들이 재창조되고 재구조화 되었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 『군주론』의 저자인 마키아벨리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것들이라는 점이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국가의 보존과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군주의 통치술을 밝히려 했다. 이 책은 도덕적 인간론과는 다른 차원의 책이다. 당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 정치 상황에서 통일국가 건설에 필요한 전략전술을 제시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탁월한 통찰력과 재치 있는 반전의 이야기로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실용적인 책략들이 도처에 담겨 있어 리더십 관심자들의 시선을 모으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온갖 해석이 가능한 문제요소들을 듬뿍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풍성한 함의 도출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마키아벨리는 이 책에서 "군주는 특히 신생 군주는 일반인들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항상 처신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끔 정직, 자비, 친애, 종교의 가르침 등과 반대로 행하도록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는 가급적이면 올바른 행동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아야 하겠지만 꼭 필요하다면 악행을 개시할 수 있어야 한다(『군주론』,17장)"고 주장하였다. 결국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 방법도 가리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한 것이다. 권력의 생리에 필요한 정권 유지용 조치였다. 이것이 바로 마키아벨리즘이다. 서구의 많은 통치자는 실제로 이런 가르침을 현실 속에 그대로 적용하곤 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글 속에서 구체적인 군주명을 들지는 않았지만 당시 실재하는 사람들을 염두해 두고 글을 쓴 흔적들이 나온다(18장). 이는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전하고자 한 것이 결국 권력 장악, 권력 유지, 권력 확장에 대한 지식이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권력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잠깐 다루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우리는 흔히 권력이라고 하면 정치권력만을 상정하는 경향이 짙은데 사실상 권력은 더 많은 경우로 분류될 수 있다. 권력의 한자 풀이를 하자면 권한(權)+힘(力)을 의미하는 두 한자의 결합이다. 그 뜻은 "남을 지배하여 복종시키는 힘"이라고 설명된다. 영어권에서는 '권력'을 power 혹은 authority라는 단어로 대신하고 상황에 맞춰 관형적 단어를 추가하여 사용한다. 맥락상의 쓰임을 중요시 하는 영어 표현 방식은 정확한 의미 전달을 필요로 하는 현대적 상황에서 적합한 표현 방식이라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현실적 구체성을 지닌 맥락에서 그 개념을 상정한다면 다음과 같이 크게 세 층위 즉, 물리적 권력, 지위권력, 소유권력 등으로 분류해 설명하는 것이 개념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우선 물리적 권력이라 하면 물리적으로 실제 하는 힘을 전제한다. 무력의 사용은 곧 물리적 권력의 발동을 의미한다. 물리적 권력은 사람에게 두려움을 유발시켜 강제적인 통제가 가능하게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방적 억압 현상이 나타나는 곳에는 물리적 권력이 배후에 있는 경우가 많다. 역사의 많은 불의와 부조리 뒤에 물리적 권력이 작동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목격하고 있다. 물론 강력한 물리적 힘이 도덕적 선과 결합하면 평화를 유지하고 사람들의 개별적 돌출행동을 억제하는 기제로 사용되기도 한다. 구체적인 예로 국가가 세운 법은 때로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해 사회의 질서를 잡는다. 하지만 물리적 힘은 부도덕한 세력에 의해 불의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물리적 권력이 클수록 강제적 힘을 동원하려는 유혹에 더 쉽게 노출된다. 국가 간에도 강력한 무력을 지닌 국가가 약한 국가를 침략하기도 하고 가정 안에도 무력행사를 당연시 하는 남성에 의해 가정 폭력이 발생하곤 한다. 이렇듯 물리적 권력은 강화될수록 평화보다는 긴장과 갈등관계를 더욱 유발시킬 위험성이 높아진다.

지위권력은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이나 상위 직책에게 주어지는 힘을 연상하면 된다. 높은 계층의 신분을 지닌 사람은 낮은 계층(급)에 속한 사람보다 여러 면에서 특권을 누린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지위권력이다. 군대에서 상급자는 하급자에게 명령한다. 명령이 가능한 것은 지위권력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개인이든 그룹이든 상급자는 목표를 위해 하급자에게 작업을 지시하게 된다. 명령이나 지시가 대부분 당연시 되는 이유는 지위권력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기 때문이다. 과거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내는 남편의 요구나 지시를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도 나름의 지위권력에 해당되는 것인데 과거 전통적 가부장 사회에서는 남편이 아내보다 우위를 점유하는 관습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종종 지위권력은 교회의 조직적 형태에서조차 나타날 수 있다. 중세의 가톨릭은 성직주의를 통해 질서를 잡았다. 성직주의는 일종의 지원권력에 종교의 권위까지 덧입힌 권위주의의 산물이다. 성직주의의 잔해는 중세의 가톨릭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개신교에 까지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교회를 몸의 유비로 해석하지 않고 일종의 권력기관으로 인식하여 목사직, 장로직, 집사직, 평신도가 일종의 지위권력 관계로 해석된 까닭이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지위가 아니라 기능(역할)이다. 일, 임무로서의 '직(職)'이 벼슬로서의 '직(職)'으로 인식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세상의 사회조직체가 되고, 신앙공동체의 리더십은 지위권력이 된다.

소유권력은 무언가를 소유함으로써 따라오는 권력을 말한다. 재물, 사람, 지식정보, 인기 등은 그 소유 여부에 따라 엄청난 힘이 주어진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재물을 통해 남들이 이룰 수 없는 자신만의 뜻을 실현시킬 수도 있다. 일단 재물(돈)을 많이 소유하면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허리를 굽히고 재물 위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돈으로 못 살 것이 없다. 하지 못할 일이 없다. 돈은 사람의 행동범위를 넓히고 마치 시공을 초월할 것 같은 해방감을 제공한다. 돈으로 언론을 조작하기도 하고 돈으로 기술을 사기도 하고 편리함을 얻기도 한다. 돈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돈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사기도 한다. 이는 돈이 지닌 위력이다. 돈이면 정치가도 고개를 숙이고 돈이며 울며 보채던 아이들도 입을 다문다.

중세 초기 세속에서 벗어나 있던 수도원은 세월이 흘러 재산소유가 많아지면서 부패한 소굴로 변질되었다. 중세의 교계는 돈으로 성직을 샀고(simony) 돈으로 영권을 얻었다. 중세의 대표적인 성당인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은 돈으로 쌓아 올렸다고 해도 사실상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앞에 서면 그 모든 어둠의 흔적을 가려 버린 예술적 건축미의 화려함에 모두가 넋을 잃고 쳐다볼 뿐이다. 교회가 돈을 사랑하는 순간, 일만 악이 교회당 문을 박차고 몰려 들어온다. 교회의 재직들이 금전에 연루된, 추한 이해관계에 휩싸이게 되면 그때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던 예루살렘 성벽의 돌들은 하나 둘씩 힌놈의 골짜기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미국 기독교계의 차세대 리더인 밥 로버츠 Jr. 목사는 미국의 교회 현실을 들추면서 "넓은 땅에 큰 교회, 풍족한 예산 외에 우리가 정말 이룬 것이 무엇이냐?(Transformaion, 29)"고 꼬집었다.

소유권력 중에 사람만큼 흥미로운 소유가 달리 없다. 수하에 많은 사람을 두면 그들을 다목적으로 활용하는 데 유익하다. 영민한 인재들을 주변에 두고 있으면 천하의 온갖 정보와 기술을 마음껏 접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을 통해 욕망성취를 광범위하게 확장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허나, 많은 백성을 거느리게 되면 숱한 아부소리에 판단력이 흐려지고 자부심과 성취욕에 사로잡혀 자기 능력 이상을 구상하게 된다. 이로써 주제를 모르는 교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여호와께서는 구약의 모세와 다윗에게 백성의 수를 세지 말라 하셨다. 백성들의 수로 인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우를 범할까 우려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지시된 말씀을 잠시 잊고 자기 힘을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 결말은 하나님의 징계였다. 현대의 교회들이 왜 그렇게 성장 일변도를 지향하게 되는가? 교인수가 많아지면 재정이 늘어 성전건축과 같은 새로운 일을 추진할 수 있고 성공한 목회자, 큰 교회 재직이라 불리어지는 것에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권력에 매료된 교회 리더십은 세상 리더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소유권력은 지식정보와 인기를 소유할 때도 나타난다. 지식정보는 사람에게 힘을 준다. 지식을 쌓는 일은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며 성숙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지식정보가 권력이 되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고급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루아침에 부를 쌓을 수 있고 전문지식에 출중한 사람은 앞 다투어 사람들이 모셔가는 인물이 된다.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권력을 얻는 방편이 되거나 권력층에 편입되는 기회를 얻는 길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명문대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 결과가 힘을 얻는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기도 권력을 얻는 데 유력한 요소로 작용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전쟁에 나가 영웅적 승리를 얻어 인기를 차지하고 탁월한 연기력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사람들은 그 자체가 권력이 된다. 인기스타는 몇 마디 말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조종하고 통제하기까지 한다. 이런 연고로 무대 위에 오르는 숱한 사람들이 인기를 얻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보인다. 현대의 정치가들도 인기를 얻는 길이 곧, 표를 얻는 길이고 그 길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는 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 글은 "세상의 리더는 권력을 지향한다"는 말로 시작하였다. 이런 타이틀을 제시한 이유는 세상의 리더들은 전술한 여러 권력을 수단으로 하여 리더십을 실현해 간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세상의 권력은 결국 세상의 리더십과 통한다. 권력은 리더에게 날개를 달아 주기 때문이다. 세상의 리더는 어떤 형태로든 권력을 잡고 이를 활용함으로써 리더십을 발휘한다. 세상은 이런 방식으로 질서를 만들어 간다. 어떤 이는 권력을 무력으로 얻어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돈으로 권력의 자리를 사기도 한다. 권력이 없다면 누가 그를 따르겠는가? 권력이 사라지면 추종자들마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권력의 생리다. 권력이 부재한데도 추종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유형의 리더십이다. 세상의 질서는 권력에 의한 질서이다. 추종자를 만들고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데는 필시 권력이 작용한다. 누군가에게 삯을 주지 않으면 그의 손을 빌릴 수 없다. 누군가의 상급자가 되지 않으면 그에게 일을 시키기 어렵다. 누군가의 동의를 끌어내는 데도 더 나은 지식정보를 갖고 설득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런 이유해서 지도자는 권력을 필요로 하고 권력을 통해 사람들을 제어하여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 이런 배경과 세상 풍조를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다른 길을 가셨다. 그분이 사람들을 인도한 원천은 세상 권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리적 권력이든 지위권력이든 소유권력이든 이러한 힘을 지닌 자들이 세상에서 리더로 설 가능성이 높은 게 현실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 각자의 역할을 나누어 발휘한다. 여러 리더들의 각자 다른 기능이 때로는 역할분담을 통해 조화를 가져오는 듯하지만, 많은 경우에 힘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는다. 권력은 매혹적인 것이기에 인간의 욕망과 맞닿으면 그 유혹의 구렁에서 벗어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정치적 지위권력은 모든 권력의 상층부에서 여타의 권력을 흡수할 수 있는 가장 큰 통제력을 가진 탓에 리더들의 선호대상이다. 세속의 권력 양상은 모든 국면의 리더들에게 모델이 된다. 세속 모델이 보여주는 풍조에 맞춰 파도를 잘 타는 리더는 자신이 원하는 성취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파도타기 기술은 도덕성이나 인격성을 갖추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권력이 지향하는 세속적 리더십이 교회 안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에 문제는 없을까? 제자들이 권력의 자리 문제로 갈등을 빚던 정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천명하신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5-27)." 이렇듯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로 살고자 하는 신앙리더의 행보가 권력자의 길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음을 자명하게 확증하고 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