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토지의 서문[1] 끄트머리에 소멸시기는 다가오고 삶의 의미는 멀리 있어 안타까워하는 장면이 있다. 너무 아득하다며 허연 머리칼의 작가가 절절이 새겨놓은 글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길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성경을 가까이 하는 우리에게 저 대목을 갖다대면 어떤가. 생명의 시간은 다되어 가는데 천국에 이르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치환할 수 있겠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입을 열어 고백하나 정작 그리스도께서 걷는 그 <길>은 베드로조차 알지 못한다. 곧 있을 예루살렘의 일을 듣고선 외려 예수께 항변한다. 지상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의 모습이다.

Quo Vadis, Domine

마가복음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어는 <길>이다. 복음 시작부터 길을 준비하고 길을 곧게 하라(막1:3)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한다. 이 메소드를 통해 마가는 그리스도께서 걸었던 길을 따라 제자들이 가야할 길을 제시한다. 누군가의 제자가 되려면 그 스승의 나아가는 바를 이해하고 따라야 할 테다. 그리스도의 제자 되기를 희망하기에 그의 삶 행적 인품 가르침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제자된 우리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마가복음의 이야기 동선을 걷다 보면 '제자도 프로젝트'를 위한 세 갈래 길을 만나게 된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 고난 후 부활하여 다시 갈릴리로 이어지는 공간적 이동의 길, 장차 십자가 구원 사역이 이루어질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고난당하는 종으로 그려지는 그리스도 수난의 길, 그리고 예수께서 걷는 길을 따라가야 하는 참 제자의 길이 마가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문학적 구조를 이룬다. 독자는 모두 제자의 길 위에 서게 된다. 궁극은 제자도에 있다. 예수는 어떤 분인지 아는가와 우리는 진정 그의 제자인가의 문제를 놓고 1세기 복음의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이천 년 지난 오늘, 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갖게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제 복음서의 구조는 확정된 그리스도의 왕권에 이어 그의 메시지 곧 복음의 선포로 넘어간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며 마가는 다른 복음과 내레이션의 패턴을 달리하는 바, 상당 부분이 길에서 이루어진다. 아니 분명히 하자면, 먼저 만들어진 마가복음의 이야기 전개를 마태 누가 요한은 전혀 따라하지 않는다는 게 맞겠다. 마가복음의 문학적 구조가 두드러진 점은 앞뒤를 포괄하는 수미쌍관의 기술에 있다. 첫머리에 나온 '하나님의 아들'이 끄트머리 15장에서 예수 사형을 집행하는 로마 백부장의 입을 통해 the Son Of God이란 고백으로 이어지게끔 한다.

마태에서 산상 설교가 돋보인다면 마가에선 길거리 설교가 이에 대응한다. 복음 첫 대목부터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길>을 드러낸다. 급박을 표현하는 <곧>이란 단어와 함께 마가복음의 대표 어휘라 하겠다. 일체 군더더기 없는 마가의 표현 기법은 여타 복음서와 달리 기록을 압축하고 어휘를 통제하여 강한 이미지를 띄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8:27-29)라는 대답도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 때의 어느 길에서다. 확대경을 대고 보면, 다른 복음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 혹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에 (눅9:20) 비해 짧다면 짧다. 절제된 언어로 핵심만 기록하는 절실함이 글 전반에 녹아 있다. 길 위에서, 길과 함께하는 그리스도 예수가 곧 길이라는 정체성의 암시를 드리운다. 예수께서 걷는 길과 제자들이 걸어야 할 길이 모두 '길 위에' 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며 갈릴리 온 동네에 선포하는 바, 광야에서 외치던 자 요한이 잡힌 직후(막1:14)다. 마태와 누가가 각기 4장쯤에서 기록하는 갈릴리에서의 복음을 마가는 1장 초반부에 던진다. 제자들 가르치심을 속히 전개하려는 시도다. 길에서 제자들과 먹고 나누며 가르친다. 남들만큼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지라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는 말처럼 '이동식 제자 훈련반'을 꾸려 길에서라도 생전에 모두 넘겨주려 한다. 비교적 짧은 복음 16장을 절반으로 쪼개 전반부 전체에 무언가를 집중하려는 느낌이다. 8장 26절까지 갈릴리에서 많은 무리를 향해 사역하다 점차 몇몇 제자들로 한정해 간다. 제자들에게 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떠나야 한다는 뉘앙스다. 왕의 제자임에랴 예수께서 대충하겠는가. 약자 섬기는 일에 충실하고 제자가 취해야 할 태도가 무언지 정신 훈련을 시작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 (막10:45)이라 말하며 종으로서 섬김과 희생의 전형을 그들에게 보이신다. 섬김과 희생만 제대로 배워도 제자들은 능히 그리스도께 인정받을 테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재차 삼차 말씀하시는 순간까지도 길거리에서 누가 더 큰 자인지 밥그릇 쟁론이나 하고 있다(막9:34). 속된 인간의 내면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될 거라 타이르고 만다. 베드로의 고백에 이어 자신의 죽음을 전하고 부활을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항변하자 사탄이라고까지 험한 말을 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속내에 역성 내신다. 제자들의 속됨과 나약을 알기에 처음부터 강하게 키우려 책략을 편 것일까 싶다. 제자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두 차례 더 죽음과 부활을 전하시고서 얻어온 나귀 새끼에 몸을 싣고 예루살렘으로 길 떠난다(11장).

예수께 예루살렘은 무엇인가. 완전한 종으로 오신 주께서 그 종의 모습이 가장 드러나는 곳, 온전히 드러내실 수 있는 장소다. 유대 종교 지도자에게 당할 일들과 고난 죽음 그리고 지상에는 없었던 부활까지, 견고한 제자도를 세우려 이제 본격 할 일을 시작한다. 스토리는 절정으로 치닫는데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늘상 거리끼듯 깨닫지 못하고 배반한다. 예수를 고발하고 모른다 부정하며 모두 도망친다. 장차 다가올 십자가 고난의 현장을 함께하며 지켜줘야 할 열두 제자는 하나도 없다. 예수께서 홀로 골고다 길을 오른다. 수난의 파도가 물러가고 고통의 구름이 지나간 후 성소 휘장이 찢어질 때, 예수를 향해 섰던 사형 집행관의 입에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 터져 나온다.

수난의 길, 수난 예고가 2장에서 시작 11장 전까지 '가장 긴 수난사'가 마가복음이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한 것처럼 제자들이 수행하는 데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이 전개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으로 8:34 진정한 제자도는 십자가의 길임을 확정한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그 길이 영광의 길, 권력의 길로 가는 줄 알고 있는 제자들의 오해와 영적 무지를 여러 번 강조하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이 수난 이후에 온다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께서 걷는 길의 의미를 알 리 없다. 실패한 제자들로 정리된다. 이즈음 반전이 있다. 성령 체험을 받고 생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 진정한 제자의 길을 다시 걷게 된다.

본문은 이제 진정한 제자도의 롤 모델을 제시한다. 여리고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통한 극적 장면 묘사 후,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 ...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10:52). 가라는 사역 임무의 명령, 믿음이라는 필수 요소, 구원이라는 궁극의 결실, 예수께서 가는 그 길까지 모두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마가 문학의 절정이다. To follow 를 사용한 이유가 심오하다. 부름 받은 자들의 응답으로 '따르다'는 표현이 정확했을 테다. 제자로서 수긍이요 궁극으로 진정한 제자가 되라는 부름이다. 예수의 정체성을 수난 이야기 끝에서, 로마 백부장이 스스로 소리 내어, 고백하게 하는 그 장면은 처음 된 자가 나중 되는 신앙체계의 역설 곧 나중 된 자가 처음되는 길로 그려진다.

섬기는 종의 모습을 간직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고난받는 자면서 궁극에 승리하는 자며, 병사들에게 모욕당하는 비천한 자가 곧 그들의 대장이 고백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은 그런 아들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는 일을 감당하신다. <길> 이야기의 극적 반전이 여기에 있다. 반전과 역설을 통해 겸손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진실된 제자도의 요소임을 우리에게 교훈한다. 하나님의 방법이고 하나님 사역의 신비로 이해한다.

마가는 본인의 글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곧 메시아가 전해주는 복음의 시작(막1:1)으로 막을 올린다. 이는 어디까지나 선지자 이사야의 선포에 근거함(막1:2)이다. 이사야서에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확정하는 선언이다. 그 프로세스를 위해 <길>이란 툴을 사용한다. <길>의 헬라어는 '지도자'와 같은 어원을 갖는다. 지도자, 길, 제자가 같은 선상에 있는 개념이다. 가르치고, 어디로 가는 과정이며, 배우는 수단이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임을 깨달을 일이요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유일한 길이다.

주어진 시간이 소멸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세운 영적 길을 찾아나서야 한다.

[1] 2002년판 서문 

-미주장신대 신학생 장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