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교회에서 접한 풍금으로 음악가의 꿈
평양요한학교에서 평생 벗 장수철·구두회 만나
'어서 돌아오오', 미국·일본 찬송가에도 수록돼
'산골짝의 다람쥐', '시냇물 졸졸' 등 동요도 많아
찬송가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산마다 불이 탄다'
영락교회 지휘, 100주년 기념곡 작곡 등 산 증인
캐나다 이민 후 목사 안수, 큰빛교회 담임 겸 지휘
만년에 '손양원', '함성 1919' 등 오페라 작품 발표
작곡가 박재훈 목사 이야기
문성모 | 홍성사 | 431쪽
캐나다에서 2일, 99세로 소천받은 '한국 교회음악의 아버지' 작곡가 박재훈 목사의 삶은 지난 2013년 문성모 당시 서울장신대 총장이 <작곡가 박재훈 목사 이야기>로 정리해 놓았다.
박재훈 목사는 이 책 '감사의 말'에서 "오늘까지 살아온 지나간 90여 년 역사의 흐름은, 일제 학정 때 나서 일제 말기에 이르는 암흑 시대, 제2차 세계대전, 해방 1945년, 건국 1948년 그리고 잠시 동안의 햇빛, 6.25 전쟁, 그 후 남북전쟁의 끊임없는 긴장 등 밝은 햇빛이 비친 환한 때보다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던 때가 그 대부분이었던 것을 기억한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저를 이 땅에서 일하며 살아올 수 있도록 허락하시며 키워 주신 임마누엘 하나님은 제가 걸어온 어둡던 앞길을 비춰 주는 등불로, 또 지팡이로 인도하셨다"며 "그래서 철없는 제가 그 크신 은혜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며 험난한 길을 그저 달려올 수 있었다"고 전했다.
박재훈 목사는 음력 1922년 11월 4일, 현재 북한 지역인 강원 김화군 김성면 방충리 99번지에서 농사와 목수 일을 하던 아버지 박창숙과 어머니 이루시 사이 9남매 중 8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배화여고를 다니던 큰누나가 가장 먼저 예수를 믿고 부모를 전도해, 박 목사가 태어날 때쯤엔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있었다. 그는 모태신앙인이 됐다. 형 3명은 모두 감리회 목사가 됐다.
▲박재훈 목사(가운데 앉은 이)가 지난 2019년 3.1절 100주년 행사에서 축도하고 있다. 왼쪽은 그의 목사안수에 도움을 줬던 고환규 목사. |
어린 박재훈은 아버지의 권유로 가난한 교회의 청소를 맡아 평일에도 교회를 드나들었다. 예배당에는 풍금(오르간)이 있었다. "라디오도 음악회도 없던 시절, 음악을 접할 수 있었던 곳은 오직 교회뿐이었다. 3년 넘게 청소를 계속한 것은 성실했다기보다 예배당에 있던 오르간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청소는 뒷전이었고, 오르간 건반만 만지작거렸던 그는, 매우 아름다웠다고 기억하는 오르간 소리를 들으며 막연하게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다. 16세 때쯤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성경 구절을 갖고 노래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그의 첫 작품이었다.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 진학 대신 농사일을 도우며 3년간 학교 소사(小使)로 일하던 그는 평양에서 목회하던 큰 형 박재봉의 도움으로 평양요한학교에 입학한다. 마침 평양에서 열리던 유명 부흥사 조경우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한 17세의 소년 박재훈은 뜨거운 거듭남의 체험을 한다.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던 1938년, 문요한 선교사(John. Z. Moore)는 성경신학교인 평양요한학교를 세운다. 그곳에서 그는 한국 교회음악의 개척자들인 장수철과 구두회를 만난다. 1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셋의 우정과 사랑은 평생 지속됐다. 이들은 일본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로 함께 유학을 떠났지만, 전쟁의 위협 속에 졸업하지 못하고 고국에 돌아온다.
박재훈은 동경 유학시절 최초의 4부 어린이 찬송가 '아기 예수'를 작곡했다. 노랫말은 친구 구두회가 썼다. 1943년 귀국 후 평양에서 서쪽으로 100리쯤 떨어진 강서 문동감리교회 부설 국민학교 교사로 들어갔다. 거기서 2주마다 요한학교 시절 스승이던 이유선을 평양까지 가서 방문해 작곡 공부를 계속 했다. 거기서 만난 전영택 목사의 8년 전 찬송시 '어서 돌아오오'에 곡을 붙였다.
이 찬송가는 우리나라 찬송가에 수록됐을 뿐 아니라, 미국 <장로교 찬송가(The Presbyterian Hymnal, 1990)>에 'O Come unto the Lord(381장)', 미국 <연합감리교회 찬송가(The United Methodist Hymnal, 1889)>에 'Come Back Quickly to the Lord(343장)', 일본 복음교단 <신성가>에 'いざ歸れや(187장)'라는 제목으로 각각 수록돼 있다.
▲작곡가 박재훈 박사. |
문동국민학교 교사로 일하다 23세 때 해방을 맞은 그는 해방의 기쁨을 함께할 우리 노래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다. 그래서 잡지 속 동시에 곡을 붙이기 시작했다. '산골짝의 다람쥐', '시냇물은 졸졸졸졸', '송이송이 눈꽃송이',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셔요' 등 지금도 널리 불리는 동요 대부분이 이때 작곡됐다.
그는 북한 공산정권의 압제를 피해 작곡했던 원고 뭉치를 품고 남한으로 내려왔다. 어린이들에게 노래를 찾아 주어야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스스로 제본하여 1947년 '일맥동요집'을 펴냈다.
문성모 교수는 이에 대해 "박재훈은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작곡가로서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여 성공한 사람"이라며 "먹고살기 바쁜 생활 가운데서도 작곡가로서의 본분에 충실했고, 하나님은 그의 성실함에 상급으로 갚아 주셨다"고 평가했다.
같은 해 찬송가와 성가곡을 모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찬송 성가집 '찬미'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대여섯 곡만 수록돼 있었지만, 1954년 제6집까지 발행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외국 민요나 사회에 퍼진 창가에 가사를 붙이는 등 찬송을 창작하는 대신 번안 사용하는데 만족하고 있었기에, 그의 작업은 '한국 교회음악의 독립을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으로 시작되는 '어머님 은혜'도 그 해 작곡했다. 이 곡은 원래 찬송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3절 '산이라도 바다라도 따를 수 없는/ 어머님의 그 사랑 거룩한 사랑// 날마다 주님 앞에 감사 올리자/ 사랑의 어머님을 주신 은혜를'이 탈락하고, 1-2절만 불리면서 일반 동요가 됐다. 김정준 목사의 시 '어머님의 노래'에 곡을 붙인 찬송은 한국인에 의한 절기 찬송가의 시초였다.
▲박재훈 목사의 자녀가 제9회 한국기독교학술상을 대리 수상하고 있는 모습. |
전쟁 중에는 '눈을 들어 하늘 보라'로 잘 알려진 곡 '믿는 자여 어이할꼬'를 작곡한다. 오전에는 정훈음악대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부산 광복교회에서 어린이 찬송가 출판을 준비하던 그는, 울산중학교 교사로 근무중이던 여류 시인 석진영이 엽서로 보낸 시를 받고 감동해 10분만에 멜로디를 써내려갔다고 한다.
전쟁 후 영락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시작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1959년까지 맡았고, 1963년 돌아와 10년 더 봉사했다. 한국교회음악협회 활동도 하면서 '어린이 찬송가'와 '크리쓰마쓰 노래 39곡집', '박재훈 동요 작곡집', '찬송가 합창곡집', '주일학교 음악지도법' 등을 발표했다.
미국 유학 후인 1963년 교회음악 전문출판사인 '교회음악사'를 설립하고, 1964년부터 격월간 전문 음악잡지 '교회와 음악'을 창간했으며, '성가합창곡집' 시리즈를 출판했다. 또 '(개편) 찬송가' 편집을 주도했고, 친구였던 장수철을 이어 선명회어린이합창단 지휘도 맡았다.
이후에는 오페라 작곡에 뛰어든다. 한양대 재직시 오페라 <에스더>를 1971년 작곡한 뒤 1972년 4월 초연했다. 이후 4회에 걸쳐 재공연이 이뤄졌다. 이와 함께 다음 작품에 대한 갈증과 연구, 악한 권력자에 대한 심판 메시지에 신경을 곤두세운 독재정권과의 불편한 관계 등으로 인해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음악위원장을 마무리한 뒤 이민을 떠나게 된다.
잠시 미국에 체류하다 캐나다에 정착해 1977년 11월 토론토한인연합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첫 사역을 시작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교회가 속한 캐나다연합교단이 상당히 진보 성향이 짙은 교단이었다. 이에 1982년 60세에 미주한인장로회 총회 캐나다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됐다.
▲박재훈 박사의 오페라 대표작 '유관순', '에스더', '손양원'. ⓒ고려오페라단 |
이후 '대한교회'라는 곳에 부임했다. 200명 있던 성도가 분란으로 다섯 가정 23명만 남은 상태였는데, '큰빛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8년간 부흥시킨 뒤 임현수 목사를 후임자로 세우고 1989년 조기 은퇴한다. 그는 목회 당시 예배 시간 설교뿐 아니라 성가대 지휘도 겸했다고 한다. 목회 은퇴 후에도 후임자를 찾지 못해, 성가대 지휘는 1996년까지 계속 맡았다.
그 사이 유신정권이 물러났다. 그는 귀국해 1983년 영락교회에서 '성 마가 수난음악'을 초연했고, 1984년 한국기독교 100주년의 노래를 작곡했다. 영락교회 창립 50주년인 1995년에는 대형 칸타타 '뿌리, 온 땅에 편만하리'를 작곡했다.
인생 후반에는 오페라 작곡에 힘썼다. 1999년 11월 민족 오페라이자 한국교회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담긴 '류관순'을 만들었고, 평생 작곡했던 작품들을 정리해 악보집으로 출판하기 시작한다. 2011년 10월에는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병마와 싸우며 말년까지 오페라 '손양원'과 '함성 1919'를 만들었다.
박재훈 목사는 한국교회 음악의 방향에 대해 "한국교회의 역사를 담아내야 한다. 역사의식을 갖고 창작하고 연주해야 한다"며 "우리 민족과 교회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은총의 자취를 발견하고, 그것을 찬양의 도구로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한국의 교회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신앙고백으로서의 찬양이 절실히 필요하다"며 "찬양이 무대음악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막아야 한다. 예배음악으로서의 찬양의 정신이 살아나려면, 신앙고백적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3.1운동 100주년 오페라 <함성 1919> 커튼콜 현장. 박재훈 목사(가운데)가 두손을 모아 올려들었다. ⓒ김신의 기자 |
책을 마무리하면서 문성모 교수는 박재훈 목사의 교회음악 작품을 시기별로 △초기: 한국인에 의한 교회음악(주체성) △중기: 전통음악을 수용한 교회음악(민족성) △후기: 역사에 뿌리를 둔 한국적 교회음악(역사성)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의 예배음악 사상에 대해서는 △예물로서의 찬양 △신앙고백으로서의 찬양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의 공존 △교회 일치와 민족 화합 등으로 특징지었다.
그러면서 "그의 찬송가와 동요들이 사랑받는 주된 원인은 서양적 멜로디의 아름다운 서정성에만 있지 않다. 그와 더불어 그 노래들의 바탕을 이루는 민족성이 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라며 "그래서 그의 서양적 멜로디조차 외래적이기보다 오히려 한국적인 음악처럼 느껴지고, 오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 교수는 "박재훈이 가장 싫어하던 것은, 교회음악은 예술적 가치가 없고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말이었다. 그는 교회음악이 세상 음악에 비해 평가절하되는 것을 경계했다"며 "또한 개념 없는 교회음악을 싫어했다. 교회음악은 철학이 있어야 하고, 역사성에 기초해야 하고, 시대적 배경을 반영해야 하고,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하나하나에 독특한 시대적·역사적 배경이 저변에 깔려 있고, 그 작품을 통하여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