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새언약교회 강양규 목사
(Photo : 기독일보) 남가주새언약교회 강양규 목사

오래전 읽은 책 가운데 팀 켈러의"탕부 하나님"이라는 책이 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베스트셀러이다. 탕자를 영어로"프라디갈(Prodigal)"이라고 한다. 이는 방탕한 아들이라는 뜻이다. 팀 켈러는 그 단어를 하나님께 붙여서"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이라고 표현했다.

누가복음 15장은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이야기이다. 둘째 아들인 탕자가 아버지께 자기의 몫을 달라고 요구해 집을 나가 방탕하게 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먼 발치에서 보자마자 벗은 발로 뛰어가 끌어 안고 입 맞추며,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제일 좋은 옷으로 입히고,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푸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가장 심기가 불편한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탕자의 친형인 첫째 아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리차드 렘브란트라는 화가가 탕자의 비유를 그릴 때, 탕자를 끌어 안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 그 옆에서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노려보는 한 사람을 그렸다. 그가 바로 첫째 아들의 모습이다.

첫째 아들은 몹시 화가 났을 것이다. 아니 못마땅히 여겼다. 둘째 아들이 방탕한 삶을 살다가 돌아온 것도 그렇지만 그를 아무 조건 없이 환대하며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어 준 것 역시 무척이나 못마땅했다. 아니, 그건 사치이고 낭비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런 탕자에게 한없이 자비를 베푼 아버지의 은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잘못된 모습이었다. 이것이 그의 엄격한 기준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첫째 아들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나와 다르면 틀린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첫째 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의 모습이라면 어떨까? 아니, 어쩌면 둘째 아들의 모습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둘째 아들인 탕자라면 여전히 첫째 아들처럼 둘째 아들인 탕자를 비난할 수 있을까? 아니 둘째 아들을 넘어 한없이 용서하고 긍휼을 베푸시는 아버지께 그 화살을 돌려 큰 소리로 컴플레인(Complain)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그러면 우리의 질문은 왜 아버지는 둘째 아들인 탕자를 용서하고 받아들였을까?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는 아들이기 때문이다. 둘째 탕자도 아버지가 낳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였다. 두 번째는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다. 호세아 6장 1절은"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 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세 번째는 이미 용서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마치 자격이 있어서 용서받고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철저히 회개했고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이미 용서하고 기다리고 계셨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그 어느 때 보다 어려운 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때로는 비대면으로 예배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허락이 쉽지 않는 시대이다. 이런 때일수록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다시 탕부 하나님을 만나러 가야 한다. 그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남가주새언약교회 강양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