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테르는 BC. 63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 로마 편에 섭니다. 친 로마적 그의 행동에 로마정부는 권력으로 보상합니다. BC. 47년 율리스 시저(Julius Caesar)는 안티파테르에게 로마 시민권과 유대지역 총독 자리를 줍니다. 헤롯 가문의 로마정권과 밀월이 시작됩니다.
그가 유대를 차지한 다음 자신처럼 야심만만한 아들 헤롯을 갈릴리 지역 통치관으로 임명합니다. 영리한 헤롯 대왕은 권력의 메커니즘에 관해서는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 하스몬 왕가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 유대 내부 반발을 정리하고 로마의 실력자를 후원자로 모시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헤롯은 천재성이 번뜩이는 감각과 근성으로 로마의 권력과 줄타기를 했습니다.
헤롯은 자신을 지켜주는 로마 후원자(주군)의 승패와 상관없이 권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헤롯은 주군이 망해도 자신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헤롯왕은 처음엔 카시우스를 섬겼고, 카시우스가 안토니에 패하자 안토니를 따릅니다. 안토니가 헤롯을 유대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가 싸울 때, 헤롯은 안토니를 돕습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이깁니다.
이쯤 되면 헤롯의 정치 생명은 끝났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헤롯은 옥타비아누스를 찾아갑니다. 왕의 복장을 해체하고 일반 평민 복장을 하고 카이사르(옥타비아누스, 가이사 아우구스도)앞에 나아가 생명을 걸고 상소합니다. 헤롯 자신을 구한 상소(上訴)는 대략 이렇습니다. "저는 저를 세워준 안토니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저의 은인이었습니다. 저는 그를 위해 충성을 다했습니다. 저는 그와 함께 패했습니다. 저는 왕관을 벗어 던지고 오직 폐하의 덕만 의지해서 나왔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살아온 신실함과 의리를 봐 주시고 저에게 기회를 주시면 남은 생명 황제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거칠게 간추린 내용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이런 헤롯의 말을 듣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황제답게 대답합니다. "좋다! 그대를 살려 주겠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확고한 왕의 자리를 보장해주겠다. 대신 그대는 안토니를 섬겼듯이 나를 섬기기를 바란다. 변함없는 충성으로 나를 따르도록 하라!" 물론 이것도 거칠게 간추린 내용입니다. 헤롯은 권력에 대한 천부적 감각과 집념으로 유대 전체의 왕이 되었습니다.
로마 황실의 든든한 후원으로 유대 왕이 되었지만 유대인들의 지지는 받지 못합니다. 헤롯은 늘 불안했습니다. 로마 지지를 받기 위해 유대인 지지가 필요했고, 유대인 지지를 받기 위해 로마 지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일평생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습니다. 헤롯 대왕의 모든 치적은 자기 권력 유지를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신약신학자 임진수 박사는 헤롯의 통치기간을 3기로 나누며 왕권을 세워가는 헤롯대왕의 삶을 추적합니다. 임박사의 글을 거칠게 간추립니다. 먼저, 헤롯의 1차시기(BC 37~27년)로 권력 강화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헤롯은 권력을 강화를 위해 정적들, 주로 자기 왕권찬탈 반대파를 제거합니다.
둘째, 2차시기(BC 27~13년)로 건축사업 기간입니다. 왕권 강화에 성공한 헤롯은 건축에 몰두합니다. 사마리아를 헬레니즘 도시로 재건하고 아우구스투스를 경외하는 의미로 세바스테(라틴어 Sebaste=Augustus)로 부르며 황제 신전을 세웁니다. 12년간 공사로 건설한 국제 해양도시는 황제에게 헌정하며 '가이사랴'로 부릅니다. 헤롯의 대표적 건축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9년간의 공사로 예루살렘성전은 헬레니즘 풍미 가득한 건물로 거듭납니다.
셋째, 3차시기(BC 13~4년) 유혈숙청 기간입니다. 헤롯 왕가의 숙청의 역사는 피비린내 납니다. 헤롯은 장모, 처남, 아내 그리고 자신의 친아들을 죽입니다. 권력을 빼앗길 것과 배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헤롯은 유언장을 세 번이나 바꿔 씁니다. 자신을 믿었던 사람들, 가까운 가족들을 죽인 그는 아들조차도 믿지 못하는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했던 아내, 친자식들을 죽이면서 왕권을 지키던 헤롯에게 새 왕이 등장했다는 동방박사들 말은 청천벽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소동(마2:3)합니다. 돌아와 새 왕에 대한 보고를 요구했던 헤롯의 뜻을 어기고 동방박사들이 딴 길로 돌아가자 헤롯은 광분합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과 근방 지역의 영아들을 잔인하게 살해합니다(마2:16~18).
헤롯의 가정사는 끊임없는 의심, 모함 그리고 처형으로 불행과 공포의 연속이었습니다. 트리니티 신학교 근동연구소 소장인 배리 벹젤(Barry J. Beitzel) 박사는 '헤롯은 10번 결혼했는데 모두 정치적인 결혼이었다.'고 말합니다. 헤롯의 인생은 불행한 권력자의 전형입니다.
헤롯은 예수님이 탄생하던 해에 죽습니다. 그는 온몸이 썩어가는 병으로 극심한 고통 중에 죽었답니다. 나고야 난잔(南山)대학에서 신약을 강의하는 야누스 크시키 박사는 헤롯이 죽기 5일전에 아들 안티파터의 사형을 로마 황실로부터 받고 집행했음을 지적하며 헤롯의 잔인성을 강조합니다.
헤롯의 건축물과 초대교회 역사 연구에 몰두하는 아일랜드 학자 바바라 메리(Barbara Mary Denise Bergin)는 건축가 헤롯을 강조합니다. 헤롯은 로마와 유대의 지지를 얻으려고, 자신의 능력 과시용으로 건축에 몰두했습니다. 처남, 장모, 아내 그리고 아들들을 죽이며 지키려 했던 그 권력욕의 끝은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슬프고, 가슴 아픈 것은 악하고 저주스러운 헤롯대왕의 삶이 그의 자손들의 삶에서 반복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