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우 목사 (켈러 한인 제일 침례교회 담임)
(Photo : 기독일보) 박진우 목사 (켈러 한인 제일 침례교회 담임)

하나님에 대한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분에 대한 사랑은 더욱 더 뜨거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으로 인해 감격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을 신앙의 첫 사랑이라고 다들 표현합니다. 그리고 교회마다 이 첫 사랑을 회복하자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아마도 지금의 미지근한 신앙이 아니라 과거에 경험했던 그 "뜨거움"을 회복하자는 것일 겁니다. 잘못된 주장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께서 나오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첫 사랑을 버렸다고 꾸중하시는 말씀으로 인해 더욱 더 그 첫 사랑을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회가 가졌던 첫 사랑을 버렸다고 꾸중하는 이유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뜨겁지 않은 신앙 때문일까요? 분명한 것은 성경에서 그 처음 사랑이 가장 뜨거운데 그 뜨거운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꾸중한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맥상 그 사랑이 "뜨거운 사랑"이라는 데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구원의 감격과 은혜"라고 보는 것이 더욱 더 타당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 "기본적인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회복해야 할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이 잃어버렸음을 회개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한 "출발점"에 다시 서야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회복하고 추구해 할 사랑은 이 첫 사랑이 아니라 더욱 더 뜨겁고 깊어져야 할 성숙한 사랑인 것입니다. 첫 사랑의 뜨거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 뜨거움은 가장 얕은 뜨거움입니다. 첫 사랑은 성숙하지 않은 서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고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4-5) 

이 처음 사랑이 가장 뜨거운 사랑이라고 이해하고 가장 뜨거운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나 큰 논리적 비약입니다. 아마 그 다음 장인 요한 계시록 3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꾸중하시면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신 것과 연관시켜서 그 처음 사랑을 뜨거운 사랑으로 해석하는 오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한 채 그 분이 주신 선물인 구원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주신 선물로 인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바로 첫사랑입니다. 선물을 주신 분이 어떤 분임을 경험해서가 아니라 주신 선물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툰 사랑입니다. 잠시 뜨겁지만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깊이가 없는 사랑입니다. 근데 이 서툰 첫 사랑을 회복하자고요?

하지만 점점 그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수록 구원보다는 그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됩니다. 선물보다는 선물을 주시는 그 분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분에 대한 사랑은 뜨거워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첫 사랑의 뜨거움보다 당연히 더 뜨거울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당연히 사랑은 깊어지고 뜨거워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뜨거움은 사라지지 않고 당연히 지속될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그 좋으신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데 사랑이 식어질 수가 있을까요?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고 뜨거워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처음 사랑보다 나중 사랑이 더욱 더 뜨거워져야 하는 겁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인간들간의 사랑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알면 알수록 실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뜨거웠던 마음은 당연히 식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뜨거움을 유지하려면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뜨거워지는 것이 솔직히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그 분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완벽하고 온전합니다. 그 분과의 교제가 깊어 질수록 그 놀라운 사랑을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더욱 더 뜨겁게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불완전하고 죄 된 인간에 대한 사랑은 노력해야지만 어느 정도 뜨거움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지만, 온전하고 완벽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함께 하면 할수록 뜨거워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근데 예수님을 이야기해도 별로 뜨거운 감격이 있는 사람들을 찾기가 힘듭니다. 썩어져 없어져 버릴 이 세상의 것들을 이야기 할 때는 그렇게 눈이 반짝반짝 하며 뜨겁게 이야기 하는데, 버러지 같은 우리를 살려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 예수님을 이야기 할 때에는 아무런 뜨거움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면서 아주 기본적이고 당연한 첫 사랑만 회복하자고 합니다. 회복해야 할 게 아니라 회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교회는 왜 이 첫사랑을 회복하자고 하는 걸까요?

어쩌면 아픈 현실이지만 혹시 그 분과의 교제를 깊이 하도록 만드는데 실패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는 데 초점을 두면서 어느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라져 버린 결과 때문이 아닐까요? 그저 교회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고, 봉사를 열심히 하고, 헌금을 열심히 하는 것 자체를 좋은 신앙이라고 착각하도록 잘못 가르친 결과일수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교회 생활 열심히 하는 것은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데까지 가도록 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 열심이 자기 의가 되거나 참된 신앙을 방해하는 심각한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의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분에 대한 사랑이 뜨거워졌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것이 아닌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저 또한 어제보다 오늘이 그 분에 대한 사랑이 더 뜨겁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뜨거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그 분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날마다 더욱 더 뜨겁게...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통하여 버리리라" <계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