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축적으로 인한 국가적 심판이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누가 그것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고대 아모리 사회의 죄가 충만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호하심을 제거했을 당시인 "4세대"에 가장 많이 질문했을 내용이다.(창 15:16)
매일 수 백 만 명의 사람들이 아침 뉴스를 검색하며 바이러스와 하락하는 세계 경제 동향으로부터 구출 신호를 찾고 있다. 세계 질서가 무너지는 묵시적 순간이 온 것 같다. 요한계시록 18 장에 설명된 문명 붕괴가 이뤄지는 것처럼 보인다.
소돔과 고모라가 마침내 티핑 포인트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모리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열쇠를 아브라함에게 주셨다. 아브라함이 "주님... 그곳에 의인이 단 열 명뿐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라고 묻자 하나님께서는 "열 명으로 인해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창 18:32).
이 나라가 심판의 전환점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는 이 사회를 벼랑에서 건지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할 남은 자들이 있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있은 지 몇 세기가 지나고, 선지자 엘리야는 시대적 위협으로 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바알에게 절하거나 입 맞추지 않은 이스라엘에서 7천 명을 남겨두셨다고 하셨다.(왕상19:18).
이러한 전략적 보존은 성경의 모든 역사적 순간 가운데 발견할 수 있다. 노아는 그 시대의 남은 자였고,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대홍수를 통해 티핑 포인트로의 진입을 멈추셨다.
필자는 우리가 다시금 전 지구적 대홍수 가운데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시대와 같이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쓸어 버릴 때까지도 깨닫지 못할 것"(마 24:39)이라고 말씀하셨다. 필자는 홍수가 우리에게 이미 닥쳤고 갑자기 많은 것을 앗아가는 순간인 것 같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앞서 많은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분명 많은 환난의 기간 중 하나에 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백악관이나 크렘린 궁, 베이징이나 다른 권력 기관에 주시지 않았다. 그 열쇠는 교회에 주셨다. 진정한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삼고 성령의 힘으로 그분의 사역을 대행하며, 교리가 아닌 말씀에 초점을 맞춰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
이러한 교회는 남은 자들로 구성되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 장에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서 간접적으로 그들의 특성을 드러내셨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피상적 관계가 아닌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신 말씀을 맡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해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들의 사역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자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제자를 삼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가르치는 일을 위임 받았다.
-그들은 세상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 헌신한다.
노아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전략적 남은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리셋 즉 새로운 시작을 주셨다. 당시 대홍수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위대한 도구가 됐다. 현재 우리에게 임한 글로벌 "홍수"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노아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서 새로운 세계와 질서를 가져올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사회가 심판의 "티핑 포인트"에 위치했다고 판단될 때 제도적 측면보다는 유기적인 측면으로 생각해야 한다. 국가가 심판을 향해 달음질하며 결정적 지점에 도달 할 때 신약 교회는 전략적 남은자(strategic remnant)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콘스탄틴이 로마 제국에 기독교를 제도화 하자 교회는 더이상 경기장에서 죽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을 누리기 시작했다. 제도화된 교회는 교회의 목적과 사명을 상실하게 됐다. 르네상스와 중세시대 교회는 군대 또는 강력한 통치자, 부와 권력을 가진 기관처럼 변질됐다. 교회는 더이상 "금과 은은 내게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더이상 절름발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없었다.
교회가 제도화 될 때 문제가 일어난다. 교회 라이브 스트리밍을 유지하기 위한 값비싼 장치들을 비롯해 엄청난 예산, 직원, 프로그램 등은 모두 긴급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요구하지만 교회의 가장 중요한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교회를 제도보다는 유기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유기체 교회는 산돌(벧전2:5)로 이뤄졌으며, 신약은 생명과 호흡이라는 두 개의 그리스어로 번역될 수 있다.
유기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충만한 제자들을 양육하고 깊은 영성으로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 무브먼트는 현상 유지를 넘어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교회는 자기 중심적 한계를 벗어나 개교회의 설립 목적을 넘어 이 땅의 교회 존재 목적을 생각할 때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변화는 위기 가운데 일어난다. 코로나 바이러스 펜데믹은 교회를 새로운 방식으로 밀어 넣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 위기를 통해 교회를 숨 막히게 하는 옷을 벗게 하시고 다시 한 번 역동적으로 일어날 기회를 주셨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숨결이 유기체 교회를 통해 불어와 찬양과 기도, 복음의 선포가 촉발되어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유기적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그들을 세상 가운데 파송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본지는 미국 크리스천포스트가 출간한 어라이즈 투게더(Arise together)를 18회에 걸쳐 번역 게재해 드립니다. 미국 복음주의 목회자들의 외침을 통해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을 붙들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