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영 미국 변호사
정소영 미국 변호사

최근 김명수 대법원장의 거짓말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사법부의 최고 수장이 한 고등법원 판사를 탄핵시키려고 하는 여당의 압력에 못 이겨 몸이 아파 사표를 내겠다고 하는 사람의 사표를 수리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 고등법원 판사는 대법원장이 자신의 사표를 수리해 주지 않은 것이 법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여당의 정치적 압력에 굴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법원장은 이를 부인했으나 자신이 말했던 대화의 내용이 폭로되면서 결국 거짓말임이 들통났다.

대법원장이 정치권의 압력에 못 이겨 엄정한 신분의 독립이 요구되는 판사의 탄핵에 동조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사법부의 역사에 두고두고 수치로 남을 것이다. 그가 사법부의 수장이 아니었다면 그의 행동이 이렇게까지 국민들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의 법과 정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측면에서 국민적 기대를 받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기에 이번 사태는 너무도 심각한 문제이다.

필자에게 성경을 제외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 책 중 하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이 책은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비열하고 저급해질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동시에,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존엄하고 고상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후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조금 더 깨닫게 됐고, 인간에 대해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만큼 존엄한 존재이고 고상한 존재이지만, 타락한 이후 그 형상이 일그러지고 왜곡되어 끝도 없는 악을 저지를 수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두 가지 상태 어디쯤에서 조금 나은 사람으로 살기도 하고 조금 못한 사람으로 살기도 한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모두 초월적인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다. 그것이 성경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래서 인간에 대해 너무 실망도 하지 말고 너무 기대하는 것도 곤란하다고 가르치신다.

자유민주주의가 입법, 행정, 사법부를 분리하여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해 놓은 것은 바로 이러한 성경적 인간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인간의 자치 능력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온전히 그것을 선용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어느 한 쪽에 권력이 쏠리게 되면 결국 그 권력은 부패하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엄격한 삼권분립을 통해 부패를 방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자유민주주의는 무척이나 비효율적인 시스템이다. 서로 대화해야 하고, 설득해야 하고, 투표를 통해 국민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일의 진행이 무척 느리고 낭비적인 요소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비효율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한 이유는 그나마 이 체제가 가장 타락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김명수 대법관의 거짓말 사건을 통해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청와대와 여당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독립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것은 삼권분립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엄청난 위협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지는 오직 사법부 구성원들의 의지에 달린 듯하다. 더 이상 외적인 압력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사법부 구성원들의 결연한 의지가 없이는 슈퍼 여당의 권력 앞에서 지금처럼 굴복하는 모습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언론의 편파적 보도 앞에서, 청와대의 매서운 눈초리 앞에서, 포퓰리즘에 선동당하기 쉬운 국민들 앞에서 이 나라의 법과 정의를 지켜낼 수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필자는 인간 김명수가 대법원장으로서 실패한 것이 우리 사법부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김명수 대법원장도 얼마나 인간적인 고뇌가 많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도 인간인지라 실수도 하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거짓말로 덮고 싶기도 했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그래서 그가 이쯤에서 자신이 감당하기 버거운 자리를 내려놓고 그냥 자연인으로 돌아가서 평온하게 사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동시에 사법부의 자정능력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다. 비록 삼권분립이라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가 많이 폄하되었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로 작정한 소수의 법관들, 그리고 스스로 한 알의 밀알이 되기로 결단한 몇몇 판사들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인간은 못나고 비겁하고 때론 저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간에 대해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정소영(미국변호사, 세인트폴 세계관 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