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욱 박사의 '조직신학 에세이'를 게재합니다. 정성욱 박사는 세계적인 복음주의 신학자로,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M.Div.)를, 영국 옥스퍼드 대학 신학부에서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 지도 하에 조직신학 박사학위(D.Phil.)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30여권의 저서, 편저, 역서를 출간했으며, 수백여편의 학술/비학술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현재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 신학대학원(Denver Seminary) 조직신학 교수이자 아시아 사역처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지난 호에 이어서 조직신학 인간론의 중요 주제들을 묵상해 보고자 한다. 지난 호에서는 최초의 인간 (the first human being) 또는 본래의 인간 (original human being)인 아담의 상태와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마지막 인간 (the last human beings) 즉 부활인 (resurrected human being)의 상태를 비교해서 논의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호의 논의를 한 차원 진전시켜 인간 본성의 4중상태에 대해서 묵상해 보고자 한다.
인간 본성의 4중 상태란 인간이 처음 창조된 이후부터 부활 때까지 거치는 상태를 4단계로 이해하는 교리적 관점이다. 그래서 처음 창조시의 인간을 "원래의 인간" (original human beings) 또는 "무죄 상태" (the state of innocence)로 칭한다. 원래 무죄 상태에 있던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의 상태에 갇히게 된 것을 "타락 상태" (the state of fallenness) 또는 "자연적 인간" (natural human beings) 라고 부른다. 이어서 죄인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거듭나고 중생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를 "중생된 인간" (regenerated/reborn human beings) 또는 "은혜의 상태" (the state of grace)라고 칭한다. 마지막 주님 재림시 부활하여 영화된 상태의 인간을 "영광의 상태" (the state of glory) 또는 "부활인" (resurrected human beings)이라고 칭한다.
각각의 상태에서 인간이 누리는 특권과 인간이 경험하는 의무, 책임, 비참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원인의 상태 즉 무죄의 상태에 있었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선을 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상태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죄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도 지닌 상태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죄를 지을 수 있는 (able to sin, posse peccare) 상태에 있을 뿐 아니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able to not sin, posse non peccare) 상태에 있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복을 누리고, 하나님과의 행복한 인격적 교제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다. 동시에 그들은 에덴동산에 세워진 하나님나라의 헌법 즉 선악과 금명을 지키고 순종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가진 존재였다.
둘째,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고 그들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반역하여 범죄하고 타락하면서 에덴의 놀라운 복들을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나라의 헌법을 어기는 반역죄를 범한 것이다. 그 결과 에덴동산의 샬롬과 평화와 자유와 기쁨을 상실하게 되었고, 죄인을 생육, 번성케하는 저주에 처하게 되었으며, 에덴동산의 놀라운 풍요로움을 상실하고 그 땅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고,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영적으로 죽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마귀의 종과 노예가 되었다.
영적으로 죽어 마귀의 종과 노예가 된 상태에 처한 모든 자연인 즉 타락인들은 그 영혼과 육체를 포함하는 본성 전체가 죄로 부패되고, 오염되고, 타락되었다. 그 결과 선을 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죄를 범할 수 있는" (able to sin, posse peccare) 상태이면서 동시에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not able to not sin, non posse non peccare)의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죄을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란 결국 마르틴 루터가 말한 대로 "의지의 속박" (the bondage of the will, servo arbitrio)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죄의 노예, 불의의 종이 되어서, 자신의 욕망을 따라, 마귀가 이끄는 대로 종노릇 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셋째, 이런 저주와 비참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해방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거룩한 보혈과 절대적인 의만을 신뢰하는 것이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받아들일 때 그의 영혼은 거듭나고 중생한다. 이 거듭남과 중생의 순간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 새사람, 하나님의 자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성령의 전으로 영단번의 변화를 경험한다. 이 거듭남과 중생의 순간에 우리의 노예의지는 다시 회복되어 자유를 되찾는다. 그래서 중생인은 "죄를 지을 수 있는" (able to sin, posse peccare) 상태이면서 동시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able to not sin, posse non peccare) 상태로 회복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자유의지와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원래 아담의 상태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듭난 중생인의 상태가 아담의 원인 상태와 똑같아 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타락 전 아담에게는 죄가 없었지만, 우리 중생인들에게는 죄가 여전히 잔존한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거듭나지만, 우리의 몸 안에는 여전히 죄로 인한 저주와 부패성이 잔존한다. 죄에 끌려가는 경향성이 여전히 존재한다. 즉 아담에게는 없었던 죄와 죄성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잔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다른 점은 아담에게는 성령의 영구적인 내주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거듭나고 중생한 우리에게는 성령의 영구적인 내주가 있다. 물론 아담 안에 성령이 내주했느냐 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학자들 간에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필자는 중생인에게 성령님이 영구적으로 내주하시는 점에 있어서, 중생인은 아담보다 더 진일보한 차원으로 진입했다고 본다.
물론 중생인은 여전히 잔존하는 죄와 그 죄를 끌려가는 죄 된 본성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우리에게 싸워 이길 힘을 주신다. 이 영적 싸움에서 중생인은 때로는 승리를 때로는 패배를 경험하면서 영적으로 자라고 성숙해 간다.
넷째, 놀라운 구원의 삶을 이 땅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순간 우리 영혼은 영화되어 낙원으로 들어가며 그곳에서 우리 몸의 부활을 기다리게 된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 몸이 부활하게 되는데 그 부활의 상태는 처음 창조된 아담의 상태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상태이다.
부활의 상태, 영광의 상태에서 우리는 선에 대한 자유의지를 완전히 회복한다. 그 결과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able to not sin, posse non peccare) 상태로, 더 나아가서 "죄를 지을 수 없는" (unable to sin, non posse peccare) 상태로 진입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원인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여 타락할 수 있는 상대적 자유만을 누리고 있었지만, 부활 후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선택할 수 없는, 범죄할 수 없는 절대적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부활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죄가 잔존하지 못한다. 죄가 완전히 사라져 버림으로, 우리는 죄의 현존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죄의 오염과 부패를 가지고 있었던 몸이 부활됨으로 죄의 오염과 부패로부터도 완전한 해방을 누리게 된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부활인의 상태가 사실상 하나님이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위하여 창세 전부터 예비하신 지복의 상태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영광스러운 상태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타락을 허용하시고, 마침내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창조시의 아담의 상태도 너무나 놀라운 상태였지만, 타락과 구원을 통과하여 부활한 우리의 상태는 처음 아담의 상태보다 훨씬 더 진보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굳게 붙들고,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주의 자녀, 주의 제자들의 삶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 주님과 동행함으로써만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