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물은 열납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는가?
어떤 이들은 가인은 농사를 지어 얻은 농산물을 제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자로서 양을 드렸는데, 가인의 제사는 피흘림이 없고 아벨의 제사는 피 흘림이 있는 제사이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성경은 제물 모두가 피 흘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레위기 2장은 하나님께서 제물로서 소제(Grain Offering) 즉 곡물을 제물로 받으셨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나아가 아벨은 하나님께서 피 흘림이 있는 제사를 받으심을 미리 알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성경에는 "피흘림이 없는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라고 말씀해 준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죄사함을 위한 속죄제나 속건제를 위한 제사였다고 볼 수 없는 일이요, 문맥으로 볼 때 오히려 감사제 혹은 화목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제사에는 필히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벨이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다는 것이다. 왜냐면 히11:4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말씀해 준다. 이는 아벨이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미리 알고 피흘림이 있는 제사를 드렸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피흘림이 있는 제사를 드려야 했음을 미리 알았는가에 관해선 누구도 그렇다고 말할 수 없으며, 우리가 훗날 천국에 가서 아벨에게 물어본 후에 그 확실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가인은 부자였고, 아벨은 가난한 자였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노아 홍수 이전에는 사람이 먹는 음식물은 곡물과 야채, 과일들이었지 육고기가 아니었다. 당시 양을 쳤던 것은 의류를 만들기 위함이었기에 아벨은 가난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이기 때문에 구별을 두시지 않으시며, 오직 심중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우리는 남의 심중을 알 수 없고 때로는 자신의 심중도 알기 어렵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말씀해 준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드릴 때의 심중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저들의 심중을 저들보다 더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생각을 다 아시며(마9:4), 우리의 머리털 숫자까지 세시며(마10:30), 우리의 눈물까지 계수하시는(시56:8) 분이시다. 창4:3은 가인이 세월이 지난 후에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고 말해준다. 가인은 아벨과 쌍둥이가 아니었으며 아벨의 형이었다. 그러므로 가인은 농사를 시작하고 세월이 지난 후에 땅의 소산을 드렸다. 즉 첫 소산이 아니었다. 반면, 아벨은 양치는 자로서 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
우리가 가인과 아벨의 심중은 알 수 없지만 제물에는 첫 것이냐 나중 것이냐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네 재물과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3:9-10)" 하나님은 우리의 귀한 것(처음 것)을 받으시길 원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십일조를 드릴 때에도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먼저(처음 것) 떼어 놓고, 그 나머지로 생활을 해야 한다. 사용할 것을 다 쓰고 난 나머지에서 십일조를 드리게 된다면 처음 것이 아니요 나중 것을 드리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선의 순서를 바꾸었을 때에는 벌금을 20% 더해서 드려야 한다고 성경은 말해 주고 있다(레27:30-31). 이것은 마치 유틸리티의 빌을 낼 때에도 늦게 내면 벌금을 내야 함과 같다.
그러면 가인과 아벨은 어떻게 하나님이 열납하셨는가의 가부를 알 수 있었을까? 성경에 그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불로 사름으로 응답하셨을 것이라도 생각된다. 마치 갈멜산에서 엘리야의 제사를 불로 받으심(왕상18:38)과 같이 말이다. 그 후 가인은 자기의 제물이 받아지지 않음을 알고 심히 분을 냈으며 하나님은 가인에게 "왜 네가 분해하며 안색이 변함이 어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였느냐?"라고 질책하셨다. 성경은 제물을 드리는 과정에서 가인은 선을 행하지 않았으며 아벨은 선을 행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말씀해 준다. 우리는 어떻게 제사/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Good), 기뻐하시고(Pleasing, Better), 온전하신(Perfect, Best)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우리는 '예배 본다(구경한다)'가 아닌 '예배 드린다'는 표현을 사용해야 하며, 하나님이 어떠한 예배를 가장 기뻐하실까에 관심을 둬야 한다.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며 우리의 삶을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열납하시며 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아벨은 양치는 자로서 자연히 양을 드렸지만 자기에게도 귀한 첫 새끼,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정성을 다해 드렸다. 이 정성과 심중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제사와 제물을 통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해 주는 사건으로 승화시키셨다. 아벨이 드린 양의 첫 새끼는 위대한 구속사의 점차적인 계시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전한 마음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자의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기대치 못했던 축복과 구속사의 한 부분을 담당하도록 해 주시는 영광을 주신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참고) 성경에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표현되어 점차적 계시해주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가죽옷(창3:21), (2) 아벨의 양 첫새끼(창4;4), (3)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의 양(창22:13), (4) 출애굽 때의 유월절 어린양(출12:3), (5) 번제, 속죄제, 속건제에 제물이 되어진 어린양(출29:38), (6) 속건제물이 되신 어린양(사53:5-7), (7) 세례 요한의 증언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 (8) 인떼시기 합당하신 어린양(계5:7,12), (9)세상 임금들과 그 세력들에 진노하시는 어린양(계6:16), (10) 시온산에 서신 어린양(계14:1), (11) 악한 세력을 멸하시는 어린양(계19:7), (12) 어린양의 혼인 잔치(계19:7), (13) 영원한 성전과 성전의 등이 되시는 어린양(계21:22-23), (14) 주의 종들로 섬김을 받으시는 어린양(계22:3).
[출처:김근태목사 바이블확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