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를 떠난 바울 선교팀은 암비볼리와 아볼리나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이용한 도로는 주전 145년경 이 지역의 총독을 지낸 에그나티아가 건설했던 에그나티아 도로(Via Egnatia)였습니다. 이 도로는 당시 그리스 반도 북부를 동서로 연결하는 간선도로였는데 당시 교역과 문화가 전달되는 통로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도착하면서 바로 회당을 찾습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바울이 자신의 관습대로 회당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에 회당이라는 말이 19회 등장합니다. 그중에 바울의 선교활동과 관련된 회당이 13회 등장합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와 빌립보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선교에서 회당을 방문하고 회당 사역을 통해서 지역 선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상당한 유대인들이 이주해서 살고 있었던 큰 도시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BC 316년 알렉산더 대왕 후 그리스를 통치하게 된 카산더(Cassander) 장군이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부인(알렉산더 대제의 이복 여동생)이름을 따라 '데살로니가'라고 불렀습니다. 이 도시는 내륙을 잇는 에그나티아(Egnatia)도로와 항구 덕분에 번창하는 상업도시가 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현재 그리스 중앙마케도니아 주의 주도이자 그리스의 두 번째 도시입니다. 별칭은 공동수도(쉽브로테부사)입니다. 이는 데살로니가가 동로마제국 시절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두 번째 도시여서 제국의 공동 수도(쉼바실레부사)라는 별명을 가졌는데, 현 그리스공화국에서도 아테네에 이어 두 번째 도시이기 때문에 붙은 별칭입니다. 이곳은 2004년 그리스 올림픽 때 한국 축구 대표팀이 그리스와 예선전을 치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는 교회사에서 중요한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강력한 통치자로 알려진 황제 테오도시우스와 어거스틴의 스승으로 유명한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대결에 데살로니가 도시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379-395)는 신앙이 좋기로 유명한 황제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도 하나님께서 주신 자(Theo, Dosius)라 칭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식적으로 공포한 최초의 황제였습니다.
그런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390년에 어려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주둔군이 있는 데살로니가에서 주민들의 폭동 일어났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총독으로 고트 즉 출신의 부테릭 장군이 근무했었는데, 그는 참모들과 함께 시민들의 재산을 탈취했고 격분한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사령관과 참모들을 돌로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끌고 거리를 행진하였습니다.
그것은 로마제국을 향한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 항거한 주민들을 죽이라는 명을 전령사를 통해 내렸습니다. 이에 로마군인들이 현지인 7천명(어떤 자료는 6천명)을 살상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감독은 대노했습니다. 황제에게 공식적인 참회와 교회 출입 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부활절에 측근을 이끌고 예배에 참석하려 했고, 암브로시우스는 교회입구에서 입장을 막아 황제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성탄절에 다시 들어오려 했지만 주교는 또 다시 참회를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황제는 '성경에 보면 다윗도 죄인이 아니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황제께서 다윗을 모방하시겠다면 다윗의 참회도 모방하셔야 합니다!'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시민들이 보는데서 무릎 꿇고 회개했습니다. 황제는 비로소 주교의 용서를 받고 성찬례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용기와 정의감도 대단하지만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믿음과 인격도 대단합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제가 주교의 책망을 듣고 순종한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사실 황제는 로마 총독을 죽인 데살로니가 시민들을 보복하라고 했지만 곧 돌이켜 그 명령을 철회하는 명령을 내렸답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고 합니다. 다시 내린 명령을 받은 전령사가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이 암브로시우스와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일화는 훗날 카놋사의 굴욕(1077년 1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 앞에서 무릎을 꿇은 사건)과 유사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내용과 결말은 전혀 다릅니다. 황제 하인리히 4세는 한때 무릎을 꿇었으나 권력을 잡은 후 1084년 교황을 폐위시키며 복수를 했습니다. 그레고리 7세 교황은 이듬해 망명지에서 쓸쓸히 객사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3주간의 짧은 선교 활동으로 중요한 결실을 얻습니다. 야손(Jason), 아리스다고 그리고 세군도 등의 결신자를 얻고, 건강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웁니다.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로마까지 바울과 동행했던 아리스다고(Aristarchus, 행20:4,골4:10,몬1:24)는 데살로니가 교회 초대 감독이 되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시절 도시 데살로니가는 콘스탄티노플 다음가는 도시로 성장했고, 교회도 부흥하여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이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