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디는 19세기 가장 탁월하게 쓰임 받았던 부흥사요, 제3차 대각성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학력은 초등학교 5학년, 신학공부도 안했고 목사안수도 안 받았고, 문법도 맞지 않았고, 음성도 좋지 않았지만 성령께 붙들리고 하나님께 절대 순종의 삶을 삶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엄청난 부흥에 쓰임 받았다. 영국 캠브리지대학 집회에 초청받아 많은 학생들을 선교에 헌신시켰고, 헐몬산 대학생연합사경회에 주강사로 초청받아 그곳에서 100명이 선교에 헌신을 함으로 유명한 학생자원선교운동을 태동케 했다. 그의 생애는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고 순종하는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을 보여 준 삶" 이었다.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는 1837년 메사추세츠주의 노스필드에서 8남매의 6째 아이로 태어났다. 무디가 4살 때 아버지가 8자녀와 빚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셨다. 그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지 않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재판관"이시라는 말씀을 믿고 그들을 믿음과 기도로 양육하기로 한다.
따라서 무디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농사일을 돕기 위해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공부를 중단해야했다. 17세 때 보스톤으로 직장을 얻기 위해 집을 떠나 구두 소매점을 하는 외삼촌의 가게에서 구두판매를 시작했다. 신실한 외삼촌은 꼭 주일학교를 출석해야한다는 조건으로 무디에게 일을 주었다. 그러나 무디는 신앙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의 마음은 오직 돈을 벌어 출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교회에서 입교문답이 있었는데 너무 엉뚱하고 우둔한 대답을 함으로 입교문답에서 탈락할 정도로 그 때까지 영적으로 우둔한 청년이었다. 그가 다니는 교회에 에드워드 킴볼이라는 교사가 있었다. 킴볼은 영적으로 무지한 무디를 위해 성경 개인지도를 해 주었다. 무디가 18세가 되는 어느 날 "무디,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영접한 적이 있는가?" 라고 점검한 후에 그에게 복음을 제시했고 그날 무디는 양화점 뒷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죄사함과 거듭남을 체험하게 된다.
"그날 밖에 나왔을 때 태양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다. 공원에서 부르는 새들의 노래가 아름답게 들려왔고 모든 창조물들이 다 사랑스럽게 보였다" 고 훗날 고백했다. 무디는 그날 밤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 기뻐해 주세요. 1837년 2월5일은 제가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생일이지요? 오늘 4월 21일은 성령으로 제 영혼이 거듭난 생일 입니다"
1년 후에 그는 시카고로 가서 제화점 영업사원으로 일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YMCA 활동도 하고,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 전도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학력이 없다고 거절당하자 자신이 직접 전도해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술집을 구입해 개조해서 모였는데 나중에 1500명까지 모임이 커지게 되었다. 그는 버는 것을 버리고 설교자로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1857년에 일어났던 평신도중심 기도부흥운동은 무디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기도회에 참석한 후에 어머니에게 "나는 매일 밤 기도회에 참석합니다. 제가 얼마나 그 기도모임을 기뻐하는지요! 마치 하나님께서 친히 그곳에 함께하신 것 같습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의 인생의 중요한 스승들
1867년, 무디가 30세 때 영국을 최초로 방문해 세분의 중요한 사람들을 만난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를 만나 믿음의 기도에 대해 배웠고, 탁월한 설교자 스펄전을 만나 자신의 초라한 성경지식을 깨닫고 "주여 저를 가르쳐 주소서" 라고 기도한 후에 본격적인 성경연구를 시작했다. 헨리 발리목사를 만나 "세상은 하나님께서 완전히 헌신되고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일을 보아야한다"는 도전을 받고 "주님, 제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다짐한다.
영국에서 돌아와 청소년 전도자 헨리 무어하우스를 초청해 1주일간 집회를 했는데 무어하우스는 일주일 내내 요한복음3:16절 말씀으로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깊이 있게 전하는 말씀에 큰 은혜를 받는다. 그리고 무디는 정죄 설교 대신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그의 설교의 주제는 "God is Love!"였다. 이후 무디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성경을 연구했고, 때로는 한 달간 서재에 박혀 성경연구에 집중하기도 했다.
위로 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
무디는 대단한 열정과 정력, 대단한 영적 야망을 가진 자로 육체적 열심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었다. 1871년, 34세에 YMCA에서 말씀을 전했는데 두 감리교도인 부인들이 "우리는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라고 하자 그는 "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나를 위해 기도합니까?" 그녀들은 "우리는 당신이 성령의 권능을 받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후에 성령세례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그때부터 무디는 성령세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뉴욕 월스트릿을 걷고 있을 때 성령의 권능이 너무 강하게 그에게 임해 "하나님, 이제 됐습니다. 그만 주세요" 라고 할 정도로 성령께서 강하게 무디에게 임하셨다.
영국에서 일어난 엄청난 부흥의 역사
시카고 대 화재 이후 지친 몸을 쉬기 위해 1872년에 영국을 두번째 방문했다가 어느 교회에서 초청 받아 설교하게 된다. '메리앤 에들러드' 라는 병상의 여인이 부흥을 위해 기도하면서 무디의 소문을 듣고 "무디 선생이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하게 해주십시요" 라고 오랫동안 기도해 왔다. 무디가 설교하는 당일에는 금식하며 기도한 결과로 인해 그 집회에 큰 부흥을 체험한다.
1873년-1875년에 3번째로 영국을 방문한다. 이 기간에 무디와 생키는 환상의 콥비가 되어 생키는 복음송으로 심령들을 준비시켰고 무디는 설교로 그들을 결신 시켰다. 런던을 비롯해 요크 지방, 썬더랜드, 뉴케슬, 에딘버러, 글라스고우, 아일랜드 등의 여러 도시에서 289회의 집회에 259만명이 모일 정도로 영국에 엄청난 복음주의 부흥이 일어나게 되어 사람들은 휫필드와 웨슬리 이래 이렇게 깊은 감화를 받은 적이 없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영국에서의 성공적인 사역으로 인해 무디는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종으로 전 미국에 알려지게 된다.
미국의 제3차 대각성운동의 시작
1875년, 무디가 38세가 되던 해부터 무디 중심의 미국의 부흥운동이 놀랍게 불붙게 된다. 뉴욕, 브루클린, 시카고, 보스턴, 필라델피아, 신시내티, 볼티모어 등 여러 도시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그리고 한 도시에 가면 몇 달씩 집회를 계속 가졌는데 매 모임에 5,000-15,000명씩이 몰려왔고, 무디의 설교와 생키의 찬양 모음이 인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교파의 장벽이 무너졌고, 성경공부가 활발히 일어나고, 수많은 영혼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결신자들이 몰려와 교회들이 생기를 되찾게 되었다.
1876년 시카고에서 3개월간 진행되었던 전도집회를 예를 들면 총 90만명이 참석해서 6000명이 회심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렇게 미국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된 한 사람 무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무디의 생애를 통해 2억 이상의 사람들에게 복음이 선포되게 하셨고 100만명을 회심하게 하셨다.
무디 사역의 정리
1, 무디는 학력도 없고, 신학공부도 안했고, 설교할 때 문법도 안맞았고, 목소리도 안좋았으나 부단히 성경을 연구하고 전적으로 겸손하게 성령을 의지 함으로 당시 가장 영향력있는 부흥사요 설교가로 쓰임받게 된다.
2, 1870년에 유명한 음악가 생키(Ira SanKey)를 만나 생키는 복음송으로 청중들의 마음을 열었고 무디는 설교를 통해 결단 시키며 환상의 콤비를 이루어 엄청난 영혼의 대 추수를 수확했다.
3, 몇 일간 복음설교로 마음 준비를 시킨 후에 마지막 날에 결신 초청을 할려고 결신초청을 미루었다가 시카고 대 화재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 못하고 죽게 되었던 아픔과 실수를 기억하면서 그 이후로는 매 집회 때마다 반드시 결신의 시간을 가졌다.
4, 전도자 양성을 위해 여자신학교, 마운트 헐몬학교, 무디 Bible College 를 세워 수많은 전도자와 선교사들을 배출했다.
5, 빈약한 학력을 이유로 대학생 집회를 기피했던 그가 1875년 프린스턴대학 총장의 초청으로 프린스턴 대학생 집회를 집회를 시작해 예일대학 집회를 인도했고, 1882년에 영국의 옥스포드대학과 캠브리지대학교회의 초청에 응해 자주 틀렸던 문법으로 인해 조롱도 받았지만 많은 학생들을 회개시키고 선교에 헌신케 했다. 유명한 7명의 명문가 출신들이 선교지로 나가게 된 것도 그의 집회의 열매였다(그들을 '캠브리지 7인'이라 부른다).
5, 1886년에 4주동안 열리는 헐몬산 대학생연합사경회 주강사로 초청받아 이 기간에 100명이 선교헌신을 함으로 유명한 학생자원선교운동이 시작 된다.
6, 1895년에는 시카고에 기독교서회를 설립하여 성경과 찬송가, 기독교서적들을 보급했다.
많은 인간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령께 붙들리고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자 하나님은 무디를 통해서 지식인들을 부끄럽게 했을 뿐 아니라, 누구도 하기 어려운 수 많은 대학생들을 변화 시키게 하셨고 많은 젊은이들을 선교지로 떠나게 하셨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과 전도자들이 무디처럼 성령의 충만을 체험하고 성령께 붙들린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세워지도록 기도하자.
이 시대의 부흥을 사모하는 작은 종 강순영목사 (JAMA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