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개봉한 "아바타" 라는 영화에 나비 족 인사 "I see you."(나는 너를 본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 문장으로 간단한 말 같지만 의미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선입견으로 보거나 또는 깊이 없이 본다면, 그냥 "나는 너를 본다."입니다. 그럼 뭘 보아야 하는가? 라고 묻는 다면 의미는 달라집니다. 만약 의사가 환자의 상처를 보지 않고 사람만 본다거나, 교사가 학생을 보지 않고 학생의 성적만 본다거나, 회사가 사원을 면접할 때 사람을 보지 않고 써먹을 가치만 본다면, 남녀가 맞선을 볼 때 상대의 얼굴과, 입은 옷과, 수입과, 학벌과, 직장만 본다면 나는 결코 너를 보고 있지 않고 나의 필요와 욕구충족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나 나비 족의 "I see you."는 너의 내면을 본다는 뜻으로 씁니다. 어떤 때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말로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용하는 말이 그냥 말이 되어서는 안 되고 깊이를 보는 말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사람도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겠는가? 하는 겁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고난을 통해 보는 영안입니다. 고난은 영적인 일이기에 깊게 만들고 섭리까지 이루게 만들어 십자가로 몰아가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고난의 끝에서 주님을 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악을 드러내는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친구같이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같이 보이는 사람의 가면을 벗겨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 곁에서 사라지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외면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공격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심지어는 배신하는 사람들까지 많아집니다. 고난을 통해서 악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고난 통과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두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고 회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고난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쳤다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고난은 분별력을 소유 하게 됩니다.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말씀처럼, 정금 같이 귀한 믿음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고난을 통과할 때 완성되는 믿음에서 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천박한 기독교, 피상적인 기독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고난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깊이가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깊이를 알게 합니다. 행간의 의미를 읽는다는 말처럼. 표면적인 글만 아닌 이면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슴을 읽는 깊이는 고난에서 오기에 이것이 고난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나를 깊이 있게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영적 맹인을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길입니다. 본다고 다 보는 게 아닙니다. 이제는 제대로 보고 살아야 합니다. 고난 없이 눈뜸은 없고, 고난의 끝에서 주님을 보게 되고 고난의 끝에서 진실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김병규 칼럼]나를 깊이 있게 만드는 길이 고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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