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필드와 공산주의: 캄보디아의 잔혹한 역사가 한국인들에게 준 충격과 공포
1984년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 <킬링 필드>는 한국 중장년 세대 사이에서는 유명했던 작품이다.
이듬해인 1985년 한국에서 개봉되었는데, 당시 제5공화국 군사정권은 이 작품이 반공 정서를 고취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갖는다고 판단, 전국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단체관람을 권고했다.
덕분에 1980년대 중반 학창 시절을 보낸 세대(현재 40-50대 초반) 대다수는 이 영화를 한 번 이상 관람한 경험이 있다.
캄보디아 공산 정권 크메르 루즈(Khmer Rouge)가 저지른 이 대학살은 정확히 집계되지는 않았지만, 대략 100만에서 200만 가량의 사망자를 낳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크메르 루즈의 학살이 진행되기 직전에 캄보디아 전체 인구가 700만을 좀 넘는 수준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인구의 1/10 이상이 학살로 죽은 셈이다. 학살 사망자 수도 놀랍지만, 그 과정에서 보인 광기와 잔학성 역시 경악스러운 수준이다.
물론 크메르 루즈의 집권과 혁명이 가능하게 된 계기는 미국의 냉전과 제국주의 정책이었다. 북베트남 공산정권과 전쟁 중이던 미군은 베트콩 군인들이 캄보디아 지역에 건너가 미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전략을 자주 구사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실상 베트남 전쟁과 무관했던 캄보디아 북부 지역에 막대한 양의 포탄을 투하했다.
그리하여 수십만 명의 캄보디아인 사상자가 발생했고, 농경지가 파괴되었으며, 1백만 명 가량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결국 이 사건은 캄보디아 내에 극도의 반미-반서구 감정을 불러 일으켰고, 악의와 원한에 찬 캄보디아인들을 크메르 루즈 편으로 돌아서게 했으며, 결국 미군의 베트남 철수와 함께 캄보디아가 완전하게 공산화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 사실은 영화 <킬링 필드>에서도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캄보디아인들은 자신들을 미군의 마수로부터 '해방한' 바로 그 공산주의자들이 그토록 잔혹한 혁명과 학살을 촉발할 줄은 모르고 있었다.
크메르 루즈 지도부는 자신들이 정권을 잡은 1975년을 변혁의 '원년(Year Zero)'이라고 불렀다.
모든 서구화된 문화유산(캄보디아는 오랜 시간 프랑스 식민지였기에, 프랑스적 문화 요소를 다방면으로 받아들였음)을 철폐하고, 사유재산과 종교, 가족제도까지 모두 말살시키고 집단농장 노동과 사상교육으로 가득한 생활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 기준에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반발하는 자는 즉시 고문하거나 학살했다.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이 두 배는 더 가혹한 방식으로 캄보디아에서 재현된 것이다.
이렇게 강제노동과 집단생활을 강요하고, 진정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람을 고문하고 사형에 처하는 모습들은 1985년 당시 영화를 본 한국 학생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단지 농민이나 노동자가 아니라 지식인처럼 생겼기 때문에, 손에 고생한 흔적이 없기 때문에, 과거 학생이나 의사나 그 외 지적인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즉석에서 사람들을 처형해 버리는 장면들은 공산주의가 극단화되었을 때 하나의 국가 혹은 사회에서 벌어지게 될 일들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장면들이 유독 한국인들의 마음에 더 크게 와닿은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북쪽 군사분계선 위에 그와 유사한 본질을 갖고 있는 국가들, 특히 북한을 마주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캄보디아의 학살에 비해 그 정도는 약한 편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는 곳이 북한이고, 우리는 그 위협을 체감하면서 수십년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시아와 공산주의: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를 생각할 수 없는 문화사적 정황
1989년 시작된 데탕트 이후, 유럽 내 공산정권들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2019년 현재까지 아시아 지역에는 중국 공산당의 건재를 바탕으로 라오스, 베트남,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유지되고 있다.
아시아 이외 지역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살아남은 곳은 오로지 카리브해의 쿠바 한 곳 뿐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종교문화사적 측면으로 볼 때는 기독교 종교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라는 사고의 부재가 그 결정적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로부터 중세기를 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쳐, 근대 종교철학의 새 장을 연 칸트와 현대의 출발점에 선 기독교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까지, 기독교적 인간 이해를 가진 서구 신앙인들과 사상가들은 대대로 '개인'의 가치를 강조해 왔다.
기독교 교의가 역사 속에서 자주 인간을 교권 앞에 굴복시키는 압제의 굴레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어느 한 순간도 개인의 결단과 회심을 신앙의 본질로 보는 사고를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교회 전체가 중요한 만큼, 개인의 믿음의 진정성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개개인이 참된 믿음을 갖지 못한 곳에서는 참된 교회도 설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정신 가운데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서구에서 가장 먼저 개인의 '인권' 개념이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분명 이처럼 신앙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정신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러티브와 사연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져 왔고, 이런 개별성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가 이루어지고 교회의 지체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믿어온 것이다.
하지만 전편의 논평에서 언급한 것처럼, 20세기 초 정치세력화에 성공한 공산주의 사상은 헤겔 정신현상학의 약점 가운데 하나였던 전체주의적 인간 이해를 극단화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애초 이것도 공산주의 사상의 직접적 기원인 마르크스의 원(原) 사상은 아니었다. 지극히 군국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오늘날 공산주의는 개별 인간에 대한 존중이 미약했던 국가들에서 발흥한 '변질된'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라고 볼 수 있다.
공산주의가 유독 동남아 혹은 동북아 국가들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애초 이 나라들에서 인간 개개인에 대한 존중이라든지,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신앙의 향유자로서 존엄성을 갖고 있다는 의식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현세중심적이고 집단주의적인 문화를 갖고 있는 동아시아에서는, 인간 개개인이 칸트가 말한 것처럼 그 자체로 '목적'이 되기보다, 순전히 '수단'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아시아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개개인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힘, 즉 권력과 부귀영화이지, 개개인의 내러티브와 가치가 아니다.
그래서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인권이란 오로지 부유하고 힘있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이 되고 만다. 힘있는 위치에 선 '사람'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힘있는 위치에 섰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중장년 세대가 학창 시절 영화 <킬링 필드>를 보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던 이유는, 그들도 어렴풋이 그들을 둘러싼 한국적 삶의 정황의 본질을 배우거나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의 삶에서는 진정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 그러므로 공산주의 사상이 침범해 들어올 때 캄보디아나 북한에서 발생한 일이 그대로 우리 현실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 이것을 절감했기에 그 어떤 나라보다 이 영화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리라.
최근 한국 정치 지도자들의 행태는 그 당시 영화 <킬링 필드>가 주었던 공포스러운 충격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현실판 킬링 필드'인 북한을 탈출해 오는 이들을 다시 그곳으로 돌려보내는 데 협력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 <킬링 필드>의 마지막 장면은 수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주인공 디스 프란(행 응고르 분)이 캄보디아 남쪽 국경을 넘어, 태국의 적십자 구호소가 있는 곳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는 장면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가족을 돌봐준 미국인 기자 친구와 감동적인 해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인권 현실은 이런 감동적인 결말을 허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이런 성향이 가시화될 때마다, 한국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근심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개인의 신앙 자유를 금기시하는 공산주의의 불안스러운 그늘이 드리우기 때문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