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은 무엇일까?
건강(健康, health)이란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말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그 헌장에서 "건강이란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은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다. 사람은 인종·종교·정치·경제·사회의 상태 여하를 불문하고 고도의 건강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다.
예전에는 건강을 육체적·정신적으로 질병이나 이상이 없고, 개인적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신체 상태를 말하였으나, 오늘날에는 개인이 사회생활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짐에 따라 사회가 각 개인의 건강에 기대하는 것도 많아졌기 때문에 사회적 건강이란 면에서 위와 같은 정의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건강을 "모든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라고 규정하고 있어 건강을 하나의 기본권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 또한 질병이 없는 상태라는 수동적 건강에 대한 태도에서, 금주·금연 등 생활습관의 변화나 운동 같은 적극적으로 건강해지려는 노력 등 능동적 태도가 강조되고 있다.
건강의 구체적 요소로는 육체적인 형태적 요소(신장·체중과 같은 외형적 계측 값이나 내장의 여러 기관 등)와 기능적 요소(여러 기관의 생리기능이나 종합적인 체력 등), 정신 기능적 요소로 분류하여 평가하기도 한다.
성경과 건강
그렇다면 성경은 건강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성경도 분명 건강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쓴 밧모섬으로 추방되기 전 가이오에게 편지를 쓰면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 2절)라고 덕담을 하고 있다. 예수님도 자신의 공생애 동안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였다. 그렇다면 정말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성경적 건강론(전인 건강 holistic health, 전인 치유 total healing)에는 몇 가지 전제들이 있음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그 전제들 속에서 성경은 건강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전제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건강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건강하든 병약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즉 우리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눅 4:27)만이 깨끗함을 받았다. 날 때부터 소경으로 난 자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그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요 9:3)고 말씀하신다. 욥의 고난과 고통에도 욥의 친구들이 지적한 인과응보의 법은 적용되지 않았다. 현대 의학으로도 여전히 불가능한 선천성 소경에 대해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는 상상을 초월한 특별 행동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 9:7)는 한마디 말로 치유하셨다. 의학적 처방이 아닌 실로 초월적 신유였다. 이렇게 성경적 건강학은 하나님이 궁극적인 인간 생명과 건강의 주인이심을 고백한다. 이렇게 만사가 절대 주권자이시요 생명과 우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
둘째 기독교 세계관과 건강의 관계이다
성경적 건강론은 창조, 타락, 구속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한다. 현대의학은 물질과학의 기계론적,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건강을 다룬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건강에 대해 생명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게 창조되었음에도 타락한 존재가 되어 영육 간에 신음하게 되었으며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낙원(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은 영육 간에 치유 받아야 할 존재라는 구속(救贖)의 관점에서 건강의 문제를 접근한다. 일종의 통전적 차원의 성경적 전인 치유론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육체 건강론이 아닌 기독교 세계관(창조·타락·구속)의 틀 안에서 이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셋째 건강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선한 뜻이다(요3서 2)
예수님은 신앙의 유무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나아오는 각색 병자들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차별하지 않고 치유하였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방 수리아 왕의 군대 장관이었던 나아만 장군(왕하 5장)의 문둥병이 치유된 사건을 통해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가 동일하게 임함을 상기시키셨다(눅 4:27), 이렇게 육체적 건강과 치유에는 하나님의 백성과 일반인들을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의 일반적인(일반 은총 성격의) 선한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넷째 (육체적) 건강에는 작은 유익이 있을 뿐이다
건강이 하나님의 선한 뜻이기는 하나 그것은 결국 작은 유익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인간은 결국 죽기 때문이요 죽음이 전부도 아니고 한 번 죽은 이후 심판이 기다리고 있으며(히 9:27) 삶의 약함 속에도 일정한 유익은 있기 때문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라! 사람은 동물과 달리 고통과 약함 가운데서도 배우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건강할 때는 잘 배울 수 없는 것들인 경우가 많다. 약함을 통해 사람은 성숙해지고 겸손해지며 다른 사람의 입장도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배려할 줄도 알며 비로소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숙이게 된다. 나사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던 부스럼투성이의 가난한 거지였다(눅 16:19-31). 하지만 그가 죽어 천사들의 인도로 아브라함 품에 안겼음을 기억하라! 부자는 이 세상에서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육체적 즐거움을 누리며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며 살다 죽은 이후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었다.
이렇게 세상의 유익이란 그저 짧은 생애에 잠시잠간 누리는 작은 유익일 뿐이다. 일반적으로는 건강한 것이 선하나 타락된 세상 가운데서 그것은 작은 유익에 불과하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잠 24:1)는 이유다. 따라서 악인이 일부 형통할 때도 있고 심지어 악인이 죽을 때조차 "부자"처럼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도 없고 타인과 같은 병으로 고생하는 일이 없이도 살 수 있음(시 73:3-5)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형통하게 살며 교만이 목걸이가 되고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 되고 마음은 악을 토하고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거만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시편 기자는 악인들이 항상 평안하고 재물조차 날로 늘어가는 모습에 무척 힘들어한다(시 73: 6-16 참조). 불공정하고 불공평하게만 보이는 악인의 형통 문제는 시편 기자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보편적 질문이다. 시편 73편의 기자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이 악인들의 최후를 깨달았다(시 73:17). 이 세상에서는 그 작은 유익조차 누리지 못했던 나사로가 받은 영원한 위로를 기억하라.
마지막으로 생명의 모든 차원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 영광과 관련된다(고전 10:31)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생명의 건강에 담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섭리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실 때, 한 촌에 들어가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자신들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 열 사람을 말씀으로 치유하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확인을 받도록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사례한 사람은 오직 이방 사마리아인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 이방인은 이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눅 17:19).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육체적 건강이 전부가 아니요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부자처럼 자신의 부귀영화가 전부도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그 중심이다. 건강도 마찬가지다. 문둥병을 치유 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 이방 사마리아인이 바로 그 본보기였다(눅 17:18). <계속>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평택대 <과학과 신학> 교수,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