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김재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의 스위스 개혁교회 5백주년 기념논문 '츠빙글리의 성경관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특징들'을 매주 1차례 연재합니다.
3. 츠빙글리의 유산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특징들
이제 마지막으로 츠빙글리의 독특성과 그가 남긴 성경적 개혁신학의 유산을 살펴보자. 츠빙글리는 신학적인 요소들과 도시의 정치적인 요인들을 결합시켜서 지역공동체의 최고 지도자로서 능력을 발휘하였다. 취리히의 교구 목회자로서 교회당 안에서 성직자 제복을 입고서 활동하던 것에 그치지 않고, 전쟁터에 나가서 위험을 감수하면서 지역화 된 공동체의 최후 보루를 지키는데 까지 동참 하므로서 전혀 다른 종교개혁자의 모습을 남겼다. 성경의 교훈과 지역의 정치적 문제들을 포함하여 개선을 모색하는 식으로 스위스 종교개혁의 성격을 결정짓는데 결정적으로 크게 이바지 하였다.
가장 탁월한 츠빙글리 해석자로 널리 알려진 로허 (Gottfried W. Locher) 교수는, "츠빙글리언주의"라고 부르는 특별한 도시중심 개혁운동의 전형이 취리히, 제네바 등 스위스 여러 지역에서만 성취되었다는 것에 주목하라고 강조한다. 그 전형은 먼저 세례와 성찬, 예배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특징적인 성경해석이 확연히 드러났고, 츠빙글리가 취리히의 "예언자" 혹은 "선지자"로서 바른 정치를 하도록 세속정부를 이끌어 나갔다는 점이다. 츠빙글리가 1518년 취리히에 신부로 추천을 받아서 처음 부임했을 때에는 마리그나노 전투(1515)에서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지만 스위스에서는 로마 교회가 더욱 영향력을 장악하고 있을 시기였다. 츠빙글리는 1513년부터 계속된 전쟁에서 로마 교황권이 프랑스 군대에 패배하게 된 과정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1519년부터 1531년 사이에 유럽의 종교개혁이 치열하게 전개된 당시에 스위스는 열 여섯 개의 지역별 세속정부 즉 자치주, 자치도시, 봉건적 지방분권들로 구성되어져 있었다. 오랫동안 법적으로는 신성로마 제국의 일원이었고, 종교적으로는 로마 교황청의 감독 하에 있었다. 스위스 지역 칸톤들은 1499년 바젤평화조약을 맺고, 유럽의 정치를 좌우하던 제국의 명령대로 따라가야만 한다는 의무적인 조항들로부터 자유를 얻어냈다. 결국에는 스위스 동맹에 속한 지역들은 상호연합을 통해서 영토와 사람들을 지켜내야만 하는 군사적인 보호조치를 강구해야만 되었다. 스위스 동맹체에서는 일관된 외교적 정책이 아직 마련되어있지 못했었다.
츠빙글리와 취리히 세속정부가 종교개혁으로 변화하는 결정적인 시기가 몇 가지 단계로 진행되었다. 1520년 7월 15일부터 츠빙글리는 프란시스코파 설교자 프란츠 램버트와 성경해석과 설교에 대해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로 취리히 시의회는 오직 성경에 합당한 설교만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는데, 여전히 로마 가톨릭에 속한 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1521년 여름에 취리히는 교황을 지키기 위해서 이탈리아의 파르마와 피아센자로 군대를 파견했다. 이 전쟁은 취리히가 마지막으로 용병을 파송한 것이다. 그러나 1522년 1월 11일에 더 이상은 결코 용병을 파송하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츠빙글리는 스위스 젊은이들을 고용해서 그들의 피를 팔아서 이득을 챙기는 추기경들을 "늑대들"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성경적인 설교를 통해서 츠빙글리가 미사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고, 면죄부를 공격하며, 성인들과 성상숭배를 철폐를 단행하고, 스콜라주의 신학을 비판하자 취리히 시민들은 찬반양론으로 나눠졌다. 제기된 교회 개혁의 모든 사안들에 대해서 성경에 따라서만 판단해야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처음에는 츠빙글리가 용병제도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더라도, 세속정부는 용병파송을 지속한다는 결정을 했었다.
츠빙글리의 성경적 설교사역이 진행되면서, 1522년 7월, 취리히 시의회는 공식적으로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기로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흑사병에 걸려서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가 회복한 츠빙글리는 개인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한결 성숙해졌다. 여전히 교회와 성경 중에서 최종 권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었다. 1523년 1월 29일, 취리히 시청에서는 양측의 공개토론이 개최되었다. 복잡한 상황을 수습하고자 츠빙글리는 "67개 조항"을 작성 제출했는데, 성경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권위를 강조하면서, 교황, 미사, 선행을 통한 구원, 성인들의 중보, 수도원제도, 성직자의 독신주의, 고해성사, 연옥을 모두 다 반대하였다. 1523년 10월에 츠빙글리의 신학과 설교가 성경적이라는 취리히 시의회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삼는 교회의 개혁을 성취하지 않았더라면, 각 지역마다 나눠 갖고 있었던 법적인 결정사항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국가적 통합 원칙들을 제정할 수 없었다. 각각의 칸톤들은 독립적으로 결정하여 나가는 자치권을 행사하면서도, 주변의 도시들과 지역들에게 연대를 추구하고 있었다. 취리히의 결정은 콘스탄스, 울름, 프랑크푸르트, 아우구스부르그, 린다우, 멤잉겐, 스트라스부르그, 베른, 바젤, 제네바 등으로 전파되어나갔다. 츠빙글리의 영향은 제네바에까지 전달되어서 1535년에 개혁신앙을 받아들였고, 칼빈의 개혁신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터전을 제공하였다.
개혁교회 진영은 본질적으로 급속하게 경제적인 성장을 하는 네 개의 도시들을 (취리히, 바젤, 베른, 샤프하우젠) 중심으로 하는 칸톤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츠빙글리주의가 확산되는 것에 대해 위협을 느껴 보수적인 로마 가톨릭에 가담한 다섯 개의 도시들인 농촌지방들 (루체른, 슈비츠, 운터발덴, 추크, 우리, 프리부르크)은 합스부르그 왕가의 오스트리아와 1529년 동맹을 맺었다. 슈비츠에서 츠빙글리파 설교자가 이단으로 처형된 사건 때문에, 1531년에 두 번째 카펠 전투가 벌어졌고, 취리히의 개신교 진영이 패배하자, 츠빙글리의 꿈이 무산되는 것처럼 보였다. 취리히와 브렘가르텐이 포함된 아르가우 지방은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했다. 불링거와 다른 두 명의 목회자들도 역시 추방당했다. 다음 해가 되면서, 스위스는 츠빙글리를 지지하는 개혁주의 진영과 로마 가톨릭에 지속적으로 연대의식을 갖고 있는 칸톤들이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취리히를 포함하여, 종교개혁 진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한 도시들에서도, 교회의 주요 사항들은 모두 다 시정부, 귀족 정치가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의 제자로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이던 토마스 에라스투스가 제안한 바에 따라서, 교회의 출교권은 세속 정부의 통제 하에 있다고 받아들였다. 신앙고백서의 내용들, 목회자들의 활동사항, 교회의 권징, 교육, 교회재산의 관리 등 모든 결정들을 세속 정부가 주도적으로 그 지역 관내에 소관된 업무사항으로 다뤘다. 기독교 공동체와의 교류를 통해서 추진했지만, 깊은 충격을 받은 칸톤들에서는 목회자들이 정기적으로 총회를 열고 교회의 독립성을 구현하고자 시도하였다. 세속 정부와 지방 시의회에서도 어느 정도까지 목회자의 자문사항을 용인할 것인가를 놓고서 거듭된 토론을 하였다. 취리히에서는 거의 사십 여년을 목회했던 불링거가 개인적인 설득력을 발휘해서 시정부에 자문하였다.
오늘날에는 교회의 성직자 임명이나 직분자들을 세우는 결정을 각 교회가 총회의 규정에 따라서 질서 있게 진행하고 있다. 이것은 오직 교회의 재량권에 속한 일이기에, 당연히 여기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취리히, 바젤, 샤프하우젠, 베른 등 개혁진영에 합류한 칸톤에서는 시정부와 교회 사이 심각한 대립과 다툼이 끊이지를 않았다. 칼빈은 베른 시당국의 결정에 대해서 번번이 반대하였다. 왜냐면 베른 시정부가 목회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권징을 독자적으로 시행하도록 전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앙고백의 내용이라든가, 예배의 예전적 구성에 대해서도 다툼이 발생했다. 제네바에서는 1540년부터 칼빈이 독립권을 쟁취하고자 노력하였기에, 그 주변에서 큰 도시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베른 시당국과의 사이에 민감한 대립을 지속하였다. 1558년에 이르게 되면서, 스위스 개혁진영 내에서는 취리히와 제네바가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로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다.
츠빙글리의 서거 이후에, 취리히와 제네바의 종교개혁자들은 깊은 연대의식을 갖고 상호신뢰하면서 놀라운 협력을 이뤄냈다. 오늘날 세계 모든 개혁교회에 주는 교훈이 크다. 1549년에 불링거와 칼빈이 상호 존중의 정신에서 발표한 "협화신조" (Consensus Tigurinus)야말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 협력사역의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독일 말부르크에서 모인 1529년의 회합 (Marburg Disputation)이 결렬된 이후에, 성만찬 신학의 차이는 크게 부각되었다. 유럽 전 지역에서 츠빙글리와 스위스 개혁교회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군주들이 많지 않았고, 개신교 진영 사이에서도 신앙고백의 차이로 인해서 크게 흔들리게 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칼빈은 루터파 신앙고백서와 츠빙글리의 입장차이가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상호 조율을 해서 조화롭게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