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역습

로널드 W. 드워킨 | 박한선·이수인 역 | 아로파 | 436쪽 

행복 위해 사는데 왜 안 되는가?
행복의 커트라인 정해놨기 때문
행복에는 빈부 귀천이 따로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 공부하고 열심히 일을 한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파랑새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데,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행복에 커트라인을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가 어떤 조건이 갖추어야만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행복은 물과 같은 것이다. 낮은 곳이면 물은 어디든지 흘러간다. 행복은 흐르는 물처럼 호화스러운 부잣집에도 들어가지만,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도 마다하지 않고 들어간다.

어떠한 수준에 도달하면 행복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하다는 커트라인이 정해져 있지 않다. 행복은 누구나 아무 때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을 느끼는 횟수에도 제한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가 행복의 커트라인을 정해놓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불행에 젖어 사는 사람들을 보라. 하나같이 행복의 커트라인을 정해놓고 살아간다. 빚을 다 갚고 내 집을 장만해야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멋진 승용차를 타고 다녀야, 자식이 일류 대학에 진학해야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이 커트라인을 넘지 못하면 나는 불행하다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행복이 찾아들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고 싶다면, 행복의 커트라인을 정해놓지 말아야 한다. 이미 정해져 있다면, 철회시켜야 한다.

행복의 커트라인을 정해놓는 것은, 행복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쫓는 것이다. 행복의 커트라인이 정해지는 순간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행복은 느껴 보기도 전에 달아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수도원 체험 지원자들 넘치는 이유?
'성공하면 행복할 것' 커트라인 때문
인공 행복도 추구... 가짜 행복일 뿐

20세기 최고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을 배출한 미국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는 단기 수도원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기다리는 지원자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이 나이가 많고 세상에서 부와 명예를 누렸던 사람들인데, 하나같이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한다.

"내 삶은 공허하고 허무할 뿐이다. 세상의 명예와 부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이런 것을 얻어도 나는 늘 영적인 갈망을 느낀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놀랍게도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마친 후에 아예 그곳에 들어가 살기로 작정을 한다고 한다. 왜 사회적으로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저들이 굳이 말년에 와서 세속을 떠나 단순한 삶을 추구하게 되었을까?

이는 그들이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다"라는 카트라인을 정해 놓고 살다가, 결국 "그게 아니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공'이라는 신기루를 쫓으며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그것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사람이 행복에 목말라 있다 보니 '인공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인공 행복'이 가짜 행복이라고 주장하는 책이 바로 '행복의 역습'이다. '행복의 역습'이라는 제목 자체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행복이 지상 최대 과제인 미국?
행복 강박증 사회, 디스토피아
정신작용 약물, 대체의학, 운동
인기 영합적 종교계도 비판해

이 책의 저자인 로널드 W. 드워킨은 마취과 전문의사이면서 존스 홉킨스 대학교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다양한 출판물에서 문화, 정치 및 의료에 관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조미료'로 인공적인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미국 사회에 대해 예리한 통찰력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행복을 지상 최대의 과제인 양 여기는 미국이라는 행복 강박증 사회가, 결국 '인공 행복'이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유토피아의 반대말)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 어떠한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자리하고 있는지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인공 행복'을 위한 조미료의 예로 정신작용약물, 대체의학, 강박적 운동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모두 의료계가 포괄하고 있는 영역으로, 현지 마취과 의사이기도 한 저자는 의료계 내부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인공행복과 관련하여 어떤 부정적 결과를 낳았는지를 자기고백적 태도로 잘 그려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잘못된 보건의료정책을 밀어붙인 정부와 인기 영합적인 태도를 보이는 종교계에 대해서도 상당히 날카로운 메스를 가하고 있다.

이 책에 보면 30대 중반 변호사인 존 그린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돈 문제 때문에 아내와 불화가 심했다. 그는 아들의 양육권을 잃을까봐 이혼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또한 이혼하면 아내에게 위자료를 많이 주어야 했기 때문에. 그 돈이 아까워서 이혼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 상황이면 우리는 그린이 날마다 힘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린은 그런 비참한 결혼 생활에서도 마음만은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행복한 기분은 행복한 삶 때문이 아니라, 항우울제 덕분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 아내는 여전히 나쁜 여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 없어요. 뭐 어쨌든 기분이 좋아졌거든요." 지금 그린이 느끼는 행복이 바로 '인공 행복'이다.

인공 행복의 특징, 삶 부정하는 힘
비참과 고통스러움도 느끼지 못해
불행은 병, 항우울제로 행복 처방?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공 행복의 특징은 삶을 부정하는 힘이다. 인공 행복을 경험하는 사람은 비참한 삶도 비참하게 여기지 않는다. 실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만 그다지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아무리 나쁜 일이 일어나도 기분은 여전히 유쾌하다. 그 누구도 그들을 슬프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인공 행복을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은 수동적인 삶과 거짓된 삶을 살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남은 것은 인공 행복이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고, 느껴지는 행복이 실제라고 스스로에게 확신시키는 것뿐이다."

1960년 후반 미국 의사들은 삶의 불행을 일종의 질병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들이 불행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한 약이 바로 신경정신물질, 항우울제이다.

이제 슬픈 환자를 상담하고 위로를 건네는 의사들은 거의 없다. 의사들은 삶의 불행을 단순히 병으로 여기고 항우울제를 처방함으로 인공 행복을 주는 것이다.

물론 항우울제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스스로 불행하다는 생각으로 사회생활을 전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제외하고 '인공 행복'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인공 행복'이 위험한 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약을 먹고 불행감은 사라졌지만, 불행의 원인은 여전히 존재한다.

인공 행복을 누리는 환자들은 행복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계속 시달린다. 결국 맞서야 할 문제를 회피하고 그래도 괜찮다고 스스로 달래면서. 불안감을 마음 한쪽에 미뤄두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의사에게 처방받아야 하는 신경정신물질만이 인공행복을 만드는 건 아니다. 술이나 담배 같은 물질에 중독되거나, 행복하고 싶어 특정한 일이나 행동에 집착하는 것도 인공 행복을 추구하는 한 방편이다. 그러나 인공 행복은 진짜 행복이 아니라 가짜 행복이다.

그리스도인들, 진짜 행복 추구해야
진정한 행복,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운' 꽃말인 네잎 클로버 찾다가,
'행복' 꽃말인 세잎 클로버 놓친다
행운 찾으려고 일상의 행복 짓밟아
행복은 나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

그리스도인들은 가짜 행복이 아니라, 진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돼야 한다. 진짜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 행복의 시작도 예수 그리스도요, 행복의 끝도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우리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한참 학창 시절에 네잎 클로버를 찾으려 혈안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네잎클로버는 꽃말처럼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잎 클로버를 찾다 보면, 주위에 있는 세 잎 클로버를 발로 밟아 뭉개는 경우들이 많이 발생한다. 그런데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이 무엇인가? 행복이다.

많은 사람들이 행운을 찾기 위해, 일상의 행복을 짓밟는 경우가 많다. 결국 행운을 잡으려고 하는 것도 행복하기 위한 것인데, 이미 주어진 행복을 밟아 버리고 행운을 잡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일상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다.

영국에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누가 보아도 행복해 보였다. 하루는 노인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어르신, 어쩜 그렇게 항상 밝고 즐거우신지요? 그 비결이 무엇인지 좀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비결이랄 게 있나? 아침마다 눈을 뜨면 행복과 불행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거지, 나는 그 중에서 늘 행복을 선택할 뿐이라네."

행복은 나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행복은 누구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것을 소유했다고 오는 것도 아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기원전 300년경, 로마의 집정관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도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각자 행복의 대장장이다." 행복은 대장장이가 쇠를 녹여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둘째,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행복의 열쇠는 만족에 있다. 남보다 나은 점에서 행복을 구한다면 영원히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남보다 한두 가지 나은 점은 있지만, 열 가지 전부 남보다 뛰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이란 남과 비교해서 찾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할 때 오는 것이다. 바울은 '어떤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빌 4:11)고 했다.

인공 행복은 가짜 행복이다. 가짜 행복을 쫓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면 안 된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가까이에 있고 지금 누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을 선택하고, 지금 주어진 것에 만족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행복의 시작이요 끝임을 알아야 한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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