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김재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의 스위스 개혁교회 5백주년 기념논문 '츠빙글리의 성경관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특징들'을 매주 1차례 연재합니다.
서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
2019년은 츠빙글리의 개혁사상이 선포 된지 오백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이미 1984년에 츠빙글리 탄생 오백주년에 즈음해서, 그동안 잊혀진 그의 사상과 남다른 기여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과 평가가 쏟아져 나왔다. 특히 츠빙글리의 여러 저서들이 영어로 새롭게 번역되었다. 최근에 종교개혁 오백주년 대회가 활발하게 개최되었고, 역사적 교훈들과 신학적 추적들이 진행되고 있다. 2017년도에는 루터의 95개 조항 선포를 기념하면서, 종교개혁 오백주년 대회에서 거의 모든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사상들이 재조명되었다. 2004년도에는 츠빙글리의 후계자 불링거 (1504-1575)의 탄생 오백주년을 맞이하여 전세계 신학계에서는 스위스 종교개혁의 특징들을 검토하는 학술대회를 전개하였다. 2009년에는 역시 칼빈 탄생 오백주년 (1509-1564) 기념대회가 열린 제네바에서도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의 사상과 중요한 내용들을 다루었다.
오직 성경만을 최종 권위로 의존하겠다는 것이 종교개혁자들의 공통된 관점이었다.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 권위의 근거로 호소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종교개혁들 사이에는 성경에 대해서 다른 강조점들이 있고 차이점들도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개혁하려는 혁신적인 주장들을 제시할 때에 모두 다 성경에 근거하였다.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경에 의존하기 보다는 교황제 직분자들의 권위와 결탁해 있었다. 거의 모든 성직자들은 성경을 충분히 공부하지 못했다. 더구나 도덕적으로 비열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겸손하지 못했다. 중세 말기에 이르게 되어서도, 로마 고위 성직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죄와 부패함이 얼마나 큰 심판을 자초하고 있었던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순결하신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벌써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하고 말았을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성경을 연구한 자들만 도저히 이런 상태로는 로마 교회가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였고, 닥쳐온 위기를 깨달았다. 그러나 이처럼 말씀을 깨우친 종들이 증거하는 외침들은 결국 인간의 본질적인 타락과 악행들을 드러내는 것들이라서, 권세와 재물에 취해있던 자들에게는 방해물이라고 여겨질 뿐이었다. 중세말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시기는 천년동안 누적되어져 온 인간의 오만함과 실패, 인간의 어리석음과 하나님의 심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루터와 츠빙글리, 칼빈 그리고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교황의 선언이나 종교회의 결정에 많은 오류가 있음을 간파하였다. 심지어 종교개혁자들이 인용하고 많은 가르침을 얻게 된 초대교부들이나 신조들마저도 무작정 따라가지 말아야 하고, 오직 성경의 최종권위와 그 절대 진리에만 의존할 것을 호소하였다. "오직 성경으로만!" (Sola Scriptura)은 최고 권위에 대해서 호소할 때에 종교개혁자들이 최우선적으로 제기하는 공식이었다.
1. 츠빙글리의 성경관
인문주의 신학문과 전통적 로마 가톨릭 신학을 받은 후, 츠빙글리 (1484-1531)는 루터와는 전혀 독립적으로 스위스에서 자신의 개혁신학을 제시하였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경과 스위스 지역사회가 당면한 문제해결을 시도하면서 종교개혁자가 되었다. 츠빙글리가 루터의 글을 읽고 참고했지만, 그는 루터를 자신의 동료개혁자로 생각하였다. 츠빙글리가 루터로부터 깊은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거의 없으며, 훗날 츠빙글리는 자신이 성경에 기초하여서, 전혀 루터와 관련성을 갖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개혁신학을 발전시켰다고 주장했다. 루터 역시 츠빙글리에 대해서 "다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취급하였다.
1)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개혁운동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에서 결정적으로 두드러진 점은 성경의 절대 권위에 바탕을 두고 전개 되었다는 점이다. 로마 가톨릭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준 그의 놀라운 종교개혁 사상들과 빛나는 기여들은 모두 다 그의 성경 해설과 설교 속에서 주어졌다. 그는 깊은 성경연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압도되어지는 감화를 받았다. 성경의 독특한 특성과 기능에 대한 신념을 확실하게 터득한 츠빙글리는 전통이라는 허울로 혼란을 부채질 하던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였다. 츠빙글리는 개혁주의 교회의 중요한 핵심적인 신학의 주제들로써, 말씀과 성령에 의한 예배, 그리스도와 구원사역으로서의 미사철폐, 성례와 상징적 인식, 용병제도의 철폐, 국가와 세속군주 등에 대해서 강조했다.
츠빙글리는 스위스 전지역에서 가장 앞장서서 로마 교황청의 오류를 용감하게 지적했고, 미사의 철폐와 성상 제거를 위해서 투쟁하였다. 츠빙글리는 예배에서 말씀 강해를 중심으로 하는 최초의 개혁교회를 정착시켰고, 그러한 교회의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의 병폐를 고치고 국가를 새롭게 정비하도록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가난한 사람들이 교황청을 위해서 전쟁터에 나가는 용병제도를 중단할 것을 호소했다. 전통을 중시하고, 교황의 가르침에 의존해서 행동하던 로마 가톨릭파 캔톤들은 츠빙글리 진영을 무찌르고자 군대를 파견하였기에, 여러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사회정치적으로 엄청나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성경에 대한 결정적인 이해와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되어는 과정에서 츠빙글리는 어거스틴, 비텐바흐, 에라스무스를 통해서 도전과 자극을 받았다. 비엔나와 바슬레에서 인문주의를 수학하는 동안에,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와 만났었고 큰 영향을 받았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라는 기독교철학을 발전시켰는데, 도덕적 윤리적 중생과 개혁에 희망을 가졌다.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사상적인 뿌리는 초대교부들 중에서 제롬과 오리겐으로 추정되어지고 있는 바, 어거스틴의 영향력은 다소 미약하다고 평가되어진다. 바젤 대학교에서 고전적인 스콜라주의 학자들과 일부 인문주의자들에게 수학한 츠빙글리는 철학적 체계로서 생활과 도덕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다.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가 펼쳤던 "그리스도의 철학"에서 깊이 영향을 받았는데 본질적인 내용은 교회에서의 생활에 관한 것들이었다. 츠빙글리의 초기 사상에서 강조하는 도덕적 갱신은 에라스무스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1516년부터 글라루스 근처 아인지델른 교구에서 성경을 강해하면서 유명한 강사가 되었다. 츠빙글리는 원어성경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신학과 철학을 새롭게 개발하였으며, 에라스무스와 같은 박식함과 성경적인 열정을 바탕으로 프란체스코 수도회 베르나르드 삼손이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했다. 설교자로서의 명성을 얻는 츠빙글리는 1518년 취리히 대성당의 목회자로 청빙을 받기에 이르렀다.
1519년 1월 1일 (토요일)에 츠빙글리는 취리해 대성당에서 취임식을 가졌고, 그 다음 날 주일부터는 로마 가톨릭의 절기에 따라서 전통적인 본문을 다루지 않고, 마태복음을 순서대로 강해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종교개혁의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츠빙글리에게 있어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교회 개혁의 중심적인 본질이었다.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에 있어서든지 생활의 모든 부분들이 성경의 규범을 따라야 한다는 점을 확고히 제시하였다. 성경적인 규범들을 생활에 적용하려는 츠빙글리의 설교는 로마 교회의 권위를 무작정 따라가던 흐름을 바꿔놓았다.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만 순종하여야 한다는 확신들을 갖게 되자 로마 교회와의 단절에 이르게 되었고, 복음적인 성찬예배가 미사를 대체하였다. 츠빙글리의 설교사역이 진행되면서, 성경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보다는 훨씬 더 우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어졌다. 교황권으로 제정이 되었던 것들은 모두 다 제거되었다. 면죄부 비판, 성인들과 성상숭배의 제거, 스콜라주의 신학비판, 용병제도의 철폐 등이 모두 성경에 충실하기 위해서 진행되었다.
1522년 이후로, 츠빙글리는 교황의 권위나 교회의 상하 질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츠빙글리는 시의회가 승인하게될 교리의 유일한 원천은 성경이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취리히 종교개혁은 1523년 1월 29일 공식적으로 시의회에서 결의되었으니, 성직자들에게 오직 성경만을 설교하라고 명령했다. 츠빙글리의 개혁사상은 "67개 조항", 『신앙조항들의 해설』 (An Exposition of the Articles, 1523), 『간추린 기독교 입문』 (A Short Christian Introduction, 1523), 『참된 종교와 거짖 종교에 대한 해설』 (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 1525), 『신앙의 고찰』 (An Account of Faith, 1530) 등의 저술로 확장되어나갔다. 이러한 저술들 가운데서 특히, 말씀과 성령에 대한 강조가 츠빙글리의 신학 전반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강조되어져 있다.
츠빙글리의 성경해석에서 주목되는 것은,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성령의 자유로운 사역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점에 대해서 루터는 성령과 말씀을 분리하는 듯한 해석들이 나타난다고 하면서 츠빙글리를 비판하였다.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에서 무시해버린 성령의 역할과 사역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온전하게 회복을 시도하려했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 루터가 츠빙글리를 비판하였다. 츠빙글리는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은 어디로부터 불어오는지 알 수 없다"는 구절을 자주 인용했는데 하나님의 영은 자유롭게 각 개인들에게 나눠주시고, 그분의 자유에 달려있다고 풀이했다. 또한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선포하시는 그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이 말씀을 사용하셔서 그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조명하시며, 우리가 따르도록 우리를 가까이 이끄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