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주간 이사를 준비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버렸습니다. 최근 3년 동안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던 책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버리거나, Good Will에 갖다 주었습니다. 상당히 쓸만한 좋은 물건도 헐값에 팔았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깨끗하게 사는 방법이 있었는데, 왜 그렇게 소유하려고 했을까? 집착을 내려놓으면 이토록 아름다운 삶이 펼쳐지는데 왜 그토록 사소한 것들을 버리지 못했을까? 맛이 그냥 평범한 식당에 가면 주방장이 식재료가 아까워서 생선 대가리와 꼬리까지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맛있다는 식당, 고급으로 가면 갈수록, 주방장이 꼭 필요한 부위만 사용하고 남은 식재료는 과감하게 버립니다.
우리 삶이 추해지지 않고 아름다워지려면 우리에게도 과감하게 버리는 용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모세에게 있어서 이집트 왕자로서의 삶은 참으로 매혹적인 자리였을 것입니다. 내려놓기 힘든 위치요, 양보하기 어려운 자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과 자신이 해야 할 사명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자기 동족을 위해서 애굽 사람을 죽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든 살이 넘은 후에야 하나님의 뜻을 깨우칩니다. 그 때 가서야 비로소 자신의 일생이 그렇게 되어온 이유를 알게 된 것이지요. 내가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나는 왜 히브리 민족으로 태어났으면서도 바로의 궁전에서 성장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양치기로 40년을 산 것인지.... 그의 머리카락은 이제 백발이 성성하게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칩니다.
언뜻 생각하면 40세부터 80세까지의 황금기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왕이면 가장 건강하고 가장 경험이 풍부할 때 사용하시지, 하나님은 금값에 사용할 사람을 동값이 되었을 때에야 사용하시다니,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양보다는 질을 우선하시는 것 같습니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과감하게 잘라내십니다. 얼음처럼 냉정하고 칼같이 예리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독한 면이 있습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는거지 뭐~' 하면서 금기를 깼습니다. 다니엘도 사자 밥이 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그동안 해오던 습관대로 기도하리라는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10명의 각 지파 대표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신의 소견대로 보고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의견, 사람들의 갈망을 알면서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보다 자기들에게 더 좋은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즉 자신들의 안락과 공동체의 안전과 가족에게 더 관심이 쏠렸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마음이 남들과 달라서,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따라서 기뻐하셨습니다(민14:24).
예수님은 가장 충성된 제자를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16:23)
내 안에,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들을 과감히 버리는 것이 아름답게 사는 비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