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마 16:16)"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져 있다. 이 고백은 기독교 2천년 어간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탱시켜 온 근간(根幹)이며, 이 고백이 교회를 교회답게 했다.
이 표지가 상실되거나 희미해졌을 때, 교회는 유명무실해졌고 배교의 길을 걸었다. 교회가 아무리 세력을 확장하고 대단한 성취을 했어도, 이 표지에서 이탈되면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지금껏 그랬듯이, 앞으로도 이 표지는 변개될 수 없는 영원한 교회의 표적(sign)으로 남는다. 성도는 이 표지 위에 그의 신앙이 건설되도록 지엄하게 요구받아야 하고, 교회는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 쉼 없이 이 복음을 설교해야 한다.
목자인 그리스도가 교회와 그의 양(羊)들을 향해 들려줄 음성은 오직, '나 예수는 너희를 위해 죽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라는 내용이다.
양은 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영혼이 소생되고(시 23:3) 이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른다(계 14:4). 양은 다른 음성을 들으면 도망치도록 운명지어졌다(요 10:4-5).
그런데 오늘 많은 교회들이 양떼들에게 이 복음을 들려주는 일을 도외시한 채, 성경에 자신들의 이념을 채색시킨 이데올로기(ideology)를 사람들에게 전파하여 교회를 타락시키고 거듭난 택자들을 교회에서 몰아내고 가라지들로 교회를 채운다.
◈기독교 신앙을 이데올로기화 하는 설교자들
이데올로기(ideology)가 무엇인가? 인간이 자기의 추구하는 관념(idea)을 기왕의 사상에 접목시켜 사상화(ologize)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간들이 자기가 설정한 목표를 이루려고 기왕의 사상 체계에 자신의 이념을 결합시켜, 그것의 정당성과 동력을 확보하려는 꼼수이다.
그 간 사회주의, 민족주의, 무신론주의, 주체사상 등을 비롯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이 부침(浮沈)을 거듭해 왔다.
<이데올로기의 종언(the End of Ideology)>을 쓴 다니엘 벨(Daniel Bell) 같은 이는 21세기에 이르러 이데올로기는 종식됐다고 선언했으나, 인간의 욕망이 살아 꿈틀거리는 한 그것은 영원히 종식되지 않는다.
물론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파시즘(fascism) 같은 이데올로기는 자취를 감췄으나, 사회주의는 여전히 잔존하며 다양한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
때론 철학과 결탁되어 무신론으로, 때론 과학과 결탁되어 진화론으로, 때론 신학과 결탁되어 민중신학 등으로 나타났다. 근자에는 성윤리와 결탁하여 '성평등' 같은 '동성애 이데올로기(homosexuality ideology)'를 생산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역시 여전히 사람들의 정신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으며, 계속 다양한 폼(form)으로 나타났다. 물질 만능, 생명경시 사상을 구축했고, 기독교의 복 개념과 결탁하여 현세구복(現世求福), 성공지상주의 같은 실용주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했다.
이데올로기의 생산은 교회사에서도 확인되듯, 사상가나 독재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협의적으로는 신학적 소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거나 오염된 신학을 가진 신학자나 목사도 잠재적인 이데올로기 생산자 군(群)이다.
언제든 그들은 소위 '목회철학'이라는 고상한 용어로 포장하여 회중들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의 볼모로 삼을 수 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자기 욕망 성취를 위해 의도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이데올로기화(ideologize) 하는 사람도 있고, 비교적 동기와 목적도 순수하나 성경에 대한 무지와 무의식적인 그들의 욕망이 청중들의 필요와 결탁하여 그것을 도모할 수 있다.
이들의 이데올로기화의 패턴을 보면, 먼저 목표를 설정하고, 그 다음엔 그것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이론화 작업을 한다. 거기엔 주로 자신들이 임의로 편취(片取)한 성경 구절들이 동원된다.
그리곤 목표 달성을 위해 설정된 주제를 1년 내내 설교하여 청중들을 세뇌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데올로기는 생성되고 그것의 고착화가 이루어진다.
순진무구한 성도들은 목회자가 임의로 편취한 성경 구절과 왜곡된 설교에 세뇌당하여, 자신들이 성경적 목표 따라 사명에 충실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그 이데올로기에 충성을 바치게 된다. 이단 수괴들이 추종자들을 세뇌시키는 원리와 흡사하다.
최근 50-60년 어간 한국교회를 휩쓸었던 이데올로기의 자취들을 보면,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민중신학이,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종교다원주의가 나타났다.
일부 보수적인 교회들에서는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과 그의 제자 로버츠 슐러(Robert Schuller)로 이어진 '캔두 이데올로기(cando ideology)'와 그것의 응용인 '3박자 이데올로기'가 출현했다. 그리고 경제적 궁핍이 절정에 이른 제3세계 교회에서는 '실용주의 이데올로기'가 등극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소위 '비전 이데올로기(vision ideology)'가 교회를 휘저었으며,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비전 공급자(vision provider) 하나님을 등에 업은 목회자는 비전 제시자(vision givener)로, 성도들은 비전 실천가(vision maker)로 자리매김되고, 교회는 오직 그 비전을 성취하려는 비전 시연장이 된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 예수 믿는 목적과 교회의 존재 목적이 마치 '비전 성취'에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들고 나오는 내용이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이며, 그것의 근거 구절로 잠언 29장 18절이 제시된다. 그러나 그 구절에는 눈을 씻고 찾아도 그런 내용은 없으며, 정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시됐을 뿐이다.
"묵시(revelation, prophetic vision)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잠 29:18)."
근자엔 목회철학을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설정한 '동행 이데올로기'도 등장했다. 신앙의 목적이 마치 '하나님과의 동행'에 있는 것처럼 모든 설교의 가르침을 온통 그것에 맞추는 것 같다. 성도들의 경건생활을 도우려는 그의 충정은 이해되지만, 그것에 대한 기형적인 강조로 복음의 약화를 초래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us with God)' 것보다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God with us)' 임마누엘(Immanuel, 마 1:23)'에 더 강조점을 둔다.
설교자는 성도들이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겪는 버거움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현실적인 충고와 조언을 해 줄 수 있다.
자신감과 의욕을 상실한 성도들에게는 자신감을 북돋는 설교가, 현실에 매몰되어 꿈을 잃은 성도들에게는 '소망'을 주는 설교가 필요하다. 또한 경건생활을 유지하기 힘든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경건생활 지침 같은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아무리 절실하다 해도, 복음이 그것에 내내 올인할 수 없으며, 교회를 세우는 근간(根幹)이 될 수도 없다.
모두(冒頭)에 말했듯, 교회 건설의 영원한 기초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마 16:16)"라는 복음이며, 설교자는 이 복음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세우도록 부름 받은 자이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명제를 놓친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나아가 그리스도 복음은 세상을 굴복시킬 유일한 무기임을 말하고자 한다. 일부 사람들이 종종 복음은 현실에 도움을 못주는 '초월적 진리'라고 매도해 왔다. 그래서 그들은 설교자들에게 뜬구름 잡는 초월적인 복음보다는 삶에 적용력 있는 현실적인 설교를 해 달라고 주문한다.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이나, 성경에 의하면 사실 복음은 세상을 극복하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5)."
이는 예수를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복음 신앙만이 세상을 이기는 유일무이한 무기라는 뜻이다. 그것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현실 문제를 대척(對蹠)하는 다윗의 물맷돌이다.
또 효용성의 측면에서도(이는 효용성을 제일 원리로 삼는다는 것이 아니다), 비현실적이라고 비판받는 복음이 심리학의 '샌드위치 요법(sandwich therapy, 샌드위치의 속살이 빵에 서로 붙지 않도록 떼어놓는)'처럼 성도를 현실에 매몰되는데서 건져주고, 복음의 자양분으로 영적 에너지를 비축시킨다.
주일 성수, 하루 중 일정 시간을 떼어 말씀과 기도에 바치는 것도 자신을 세상과 떼어놓는 일종의 '샌드위치 요법(sandwich therapy)'이다.
끝으로 이데올로기는 '하나님 영광' 같은 신본주의에도 기생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유대교도들처럼 '하나님 영광'에 매몰된 이들이 없다.
'하나님 영광'은 그들 신앙과 삶의 으뜸 원리였다. 맛사다의 전투(the battle of Masada)에서 보듯,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이름을 위해선 언제라도 목숨을 버릴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 영광' 신학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 영광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하나님 영광의 실체인 성자를(요 1:14) 십자가에 못박았다(고전 2:8).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데올로기화된 '하나님 영광'이 얼마나 악독하게 '하나님 영광'을 대적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들의 왜곡된 '유일신 이데올로기'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만 나타나는 하나님 영광(요 5:44)을 보는 일에 실패하게 했다. '하나님 영광'의 중심축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제쳐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논할 수 없다.
이는 지고하신 하나님이 그 백성의 구속을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강생하신 성탄절 날, 천군 천사들이 목자들의 들녘에서 부른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눅 2:14)"이라는 찬송에서도 확인된다.
당신의 교회는 교회의 영원한 표지인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져 있으며, 위에 열거한 이데올로기의 누룩들에서 자유로운가?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