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일이었던 7월 4일 10시 33분에 캘리포니아의 릿지크레스트(Ridgecrest)에 6.4도의 지진이 났습니다. 꽤 오랜 동안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진이 날 때면 이렇게 무거운 땅이 어떻게 물처럼 출렁이는가 생각하여 봅니다. 강한 충격에 토양이 '액화'(liquidation)된다는 이재만 선교사님의 말씀을 생각하여 봅니다. 필리핀에서 지진을 체험한 선교사님이 '굳은 땅도 정말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정말 이 세상에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피조물은 피조물입니다.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것들이 다 흔들립니다. 세상에는 안전지대가 없고, 하나님 외에는 반석이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자신을, 혹은 자신이 가진 것을, 혹은 주변의 환경을 믿고 의지하기가 일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때가 되면 모두 상실하거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아니면 결국 그러한 것을 사용하는 나 자신이 사라지는 죽음이라는 생의 종말에 처하게 됩니다.
종교적 실존주의자였던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는 연약하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라는 현상을 "절망"이라는 단어로 풀었습니다. 동물은 절망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기에 절망을 체험합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절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소망의 가능성도 찾을 수 있습니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절망의 반대는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강화시킴으로 절망을 극복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절망 탈출방법조차도 인생의 처절한 절망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절망의 대안은 소망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찾아 만날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의 주장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에는 유일한 해독제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 없이 자신이 추구하였던 모든 것, 권력, 재물, 욕망, 감각, 향락, 웃음과 지식의 모든 것이 허무한 것임을, 그것들은 절망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해독제는 이 세상의 그 무엇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선사합니다. 신앙은 소망에 이르는 길이며, 참 지식과 능력과 권세와 의미에 이르는 만족한 첩경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한 성도는,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본다면, 진정한 소망에 이른 사람들이요, 실제로 도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不在, absence)! 나의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숨겨졌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는 사람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사람 자신이 그렇게 믿을 뿐입니다. 바로 이때가 절망의 해독제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릴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절망한 순간에도 주님은 가장 위대한 십자가의 일을 하셨습니다. 누가 성령께로부터 피하여 떠날 수 있습니까?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139:7).
[민종기 칼럼] 절망의 해독제를 찾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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