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지상의 마지막 날에 어디에 계셨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채찍질 당하시고 피 흘리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채찍질의 무서운 수난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영문(營門, camp) 밖으로 나가십니다. 고통의 극단은 바로 그곳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6시간 동안 달리심으로 겪으셨습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낳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생애의 마지막을 예루살렘 성 바깥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왕이십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그 마지막을 궁궐에서나 성전에서 마무리하시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은 병영(兵營, barrack)에서 심문과 매질을 당하시고, 성문 밖으로 나아가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특하게도 우리가 성전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2-13).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시야를 성문 밖 골고다로 돌려놓습니다.
그렇습니다. 속죄일에 드려지는 제사는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속죄제사의 예표입니다. 대제사장은 자신을 위하여 송아지의 피로 속죄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대제사장은 백성을 위하여 숫염소의 흘린 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피는 지성소의 속죄소, 시은좌(施恩座, mercy seat)에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송아지와 염소의 남은 부분, 즉 살과 가죽과 내장은 성문 밖으로 나아가서 태워지고 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결정적인 고통이 서린 곳은 십자가상이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영문 밖으로 나가라'는 말의 의미는 십자가로 나아가라는 말이며 예수님의 수치와 고난에 참여하라는 도전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우리의 가장 큰 지도자이자 유일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그러므로 그리스도 중심의 윤리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윤리이며,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는 윤리입니다. 궁극적인 계시이자 궁극적인 교사요, 우리 믿음의 유일한 창시자요 완성자 되시며 사도적 삶의 원천이 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본받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바입니다.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삶이란, 먼저 우리가 더 이상 궁궐과 성전의 영광으로 만족하여서는 아니 됨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이전의 구습을 따르지 않고, 지난날의 비전과 욕망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삶입니다. 가시관을 쓰셨던 예수님께 금관을 씌우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좌에 앉히고, 나도 여기가 좋다고 말하는 것은 영원한 나라의 면류관과 보좌를 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마 4:19) 말씀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영광의 예수님이 아니라 먼저 영문 밖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사랑의 복음을 깨닫는 자는 모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역동적인 고난 신앙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는 십자가 신앙을 통하여 영광의 보좌에 들어갈 뿐입니다.
[민종기 칼럼] 영문 밖으로 예수께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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