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인 신앙과 애국 사상 속 민족 부활을 위해
'한 알의 썩은 밀알' 되고자 했던 김마리아의 집안
대한민국애국부인회, 3·1운동 후 최대 여성조직
3·1운동 100주년 기념 2019년 봄학기 홍성강좌 '한국 근대사의 카이로스 3·1운동과 기독교 그리고 김마리아' 세 번째 강좌가 23일 오후 양현혜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부)를 강사로 개최됐다.
이날 강좌에서는 '김마리아(1892-1944)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이라는 주제로 한국의 대표적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여사를 조명했다. 김마리아 여사는 지난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바 있다.
양현혜 교수는 김마리아 선생이 여성 독립운동가로 성장하게 된 이유로 3가지를 꼽았다. 먼저 '주체적인 기독교 신앙'이다. 이에 대해 "김마리아가 태어난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이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한국 사람이 세운 '소래교회(솔래교회)'가 1883년 탄생한 곳"이라며 "서경조와 함께 이 자립적인 소래교회를 세운 사람이 김마리아의 아버지 김윤방이었다"고 했다.
둘째는 '애국정신'이다. 그는 "소래교회가 마을 중심이 된 송천리는 분위기가 특별했다. 미신이 타파됐고 개화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애국적 기풍으로 충만해 있었다"며 "애국적 기풍이 주도한 생활 개혁 중 으뜸은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 해서제일학교 설립이었다. 김마리아는 이곳에서 남장을 하고 공부하면서 그가 평생 사랑하게 될 주체적인 기독교와 애국 사상의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셋째는 '집안 분위기'다. 큰아버지 김윤오는 서경조와 더불어 송천리를 기독교 마을로 변화시킨 애국계몽운동 단체 서북학회를 조직했고, 작은아버지 김필순은 제중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됐다. 고모 김구례는 서경조 목사의 아들 서병호와 결혼했는데, 서병호는 1919년 신한청년단을 조직했고, 다른 고모 김순애는 김규식의 아내이자 상해에서 애국부인회를 이끌었다.
또 막내 이모 김필례는 김활란, 유각경 등과 함께 1923년 조선YWCA를 설립하고 중등교육 행정가로 오늘날의 정신여고를 만든 주역이고, 큰 언니 김함라는 '무궁화 사건'으로 유명한 신학박사 남궁혁의 부인이었다. 양 교수는 "주체적인 신앙과 애국 사상 속에 민족 부활을 위해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고자 했던 김마리아 집안의 분위기 역시 그를 여성 독립운동가로 만든 힘이었다"고 평가했다.
이후에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에 대해 설명했다. 1915년 김마리아는 동경 일본 여자학원(현 동경여자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고, 여기서 동경여자 유학생회 2대 회장으로서 한국 여성계를 계몽 개발시키기 위해 최초로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여성잡지 <여성계>를 간행했다.
그리고 1919년 이광수, 김도연, 백관수, 서춘, 최팔용 등과 동경 유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진 2.8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김마리아는 2․8 독립선언서를 조선에 전해 독립운동을 촉구할 목적으로 목전에 둔 졸업을 포기하고 귀국, 손병희·이종린 등 천도교 관계자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독립운동에 여성계의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기독교 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여성들을 조직했다.
이 일로 1919년 3월 5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 평양 감옥에 투옥돼 6개월간 취조를 받았다. 일제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김마리아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고, 그녀는 상악골 충농증과 귀뒤뼈 속에 고름이 생기는 '메스토이'라는 지병을 얻는다.
재판을 받을 수 없을 만큼 병이 악화된 김마리아는 8월 4일 예심 면소(豫審免訴)로 출옥했고, 퇴원 후 정신여학교로 돌아왔다. 정신여학교에는 장선희, 신의경, 김영순이 교사로 있었는데, 이들은 김마리아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더욱 활성화시킬 필요를 느꼈다.
▲양현혜 교수가 강의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
9월 19일, 김마리아, 황애시덕의 출옥 환영 위로연을 구실로 정신여학교 내 천미례(Lillian Dean Miller) 선교사 사택에 김마리아와 황애시덕을 비롯, 장선희, 김영순, 신의경, 백신영, 유인경, 이혜경, 이희경, 홍은희, 유보경, 이정숙, 이성완, 정근신, 오현관, 오현주 등 '여성 동지' 16명이 모였다.
이들은 이날 조선 각 도에 지부를 설치하고 널리 회원을 모집, 전국 부녀들이 남자들처럼 혁혁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고, 김마리아는 회장에 선출됐다.
이들의 취지문에서는 여성들이 독립 운동에 참가해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인권을 회복할 것을 촉구했다. 이를 위해 여성들이 굳건한 독립 정신, 자강력 배양, 언행 일치의 실천력, 단결력을 강조했다.
양 교수는 "취지문에는 여성들의 국민으로서의 자각과 동시에, 남성과 평등한 인간으로서의 권리에의 자각이 동시에 천명되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국내 각 중요지점에 지회를 설립하고 회원 획득에 주력할 것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문서를 인쇄해 전국에 배부할 것 △결사대로 별동대를 조직해 상해 임정을 적극 응원하기 위해 각 방면에서 금전을 모집하고 애국부인회 대표를 상해로 파견해 임시정부에 건의서를 제출할 것 △적십자사를 조직하고 세계에 애국부인회의 목적을 선전할 것 등 4가지를 당면 목적으로 정했다.
양현혜 교수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3·1운동 이후 최대 여성조직으로 성장, 비밀 항일운동을 전개해 갔지만, 11월 말 갑자기 이들에 대한 대검거 선풍이 일어났다"며 "일제 사찰 기관이 애국부인회 활동의 정보를 입수하게 된 것은 오현주를 통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오현주는 11월 7일 경북 경찰국 고등계 형사 유근수를 상해 임시정부 밀사라고 속이고 마리아와 재무부장 장선희를 자기 집으로 인도해 대면시켰다. 유근수는 오현주 남편 강낙원의 YMCA 격검 선생으로, 강낙원은 독립운동에서 손을 떼고 귀국 후 일경의 박해를 모면하고자 애국부인회의 비밀 활동을 형사 유근수에게 밀고한 것이었다.
결국 11월 28일 애국부인회 임원들인 김마리아, 장선희, 김영순, 신의경은 종로경찰서로 연행됐고, 황애시덕, 이정숙, 이성완, 오현주, 오현관 등 핵심 간부들과 밤기차로 대구경찰서 제3부로 압송됐다.
양 교수는 "체포 연행된 애국부인회 관련자는 김마리아 등 52명이었다. 석방 후 6개월 만의 재투옥이었으나, 김마리아는 '모든 일은 내가 한 것이니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른다. 내 나라를 내가 찾겠다는데 너희들은 왜 야단이냐?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며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는 태도로 심문에 임했다"며 "일제는 그녀가 들 것에 실려 겨우 재판에 출석할 수 있을 정도로 모진 고문을 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으로 제령(制令) 제77호 위반이라는 죄명을 붙인 여성 52명만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넘어갔다. 1920년 6월 29일 제1심 판결에서 김마리아, 황애덕은 징역 3년, 장선희, 이정숙은 징역 2년, 김영순, 유인경, 이혜경, 신의경, 백신영 등은 징역 1년의 형량이 구형됐다.
양현혜 교수는 "한국 여성운동은 1898년 찬양회가 조직되면서 시작된 이후 국채보상운동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여성도 국가의 일원임을 대내적으로 각인시켰다. 그러나 어느 한 지방에 국한되거나 남성의 보조적 역할에 그쳤다"며 "그러나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독립운동을 통해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여성들도 의무를 다할 것을 강령으로 하고, 전국 지부 체계를 갖추고 백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전국적 조직이었을 뿐 아니라, 결사부와 적십자부를 두어 임시정부의 독립 전쟁을 준비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한국 여성운동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단체"라고 말했다.
3.1운동 때부터 한국인이 당하는 참상들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세브란스 병원 스코필드 박사(Frank William Schofield , 石虎弼)는 주동 인물인 김마리아, 이혜경, 장선희, 이정숙 등과 아주 친밀한 사이였기에, 애국부인회 사건을 알고 더욱 놀랐다.
이에 서울로 올라온 즉시 신임 총독 사이토를 방문해 고문의 부당성과 수감자 처우 개선을 강력히 항의했다. 1920년 5월 김마리아 등은 병보석으로 석방됐고, 매일신보는 김마리아의 병세 등을 자세히 보도했다.
이런 김마리아를 두고 볼 수 없어 탈출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매큔 선교사(George Shannon McCune, 尹山溫)와 상해임시정부 교통국 윤응념 등의 도움으로 상해 망명에 성공했다. 양 교수는 "일제가 3.1운동의 의미를 무효화하려 하던 상황에서, 김마리아 사건은 3.1운동의 연장전과 같은 성격이었다"며 "조선 사회는 김마리아로 표상되는 항일 의지를 통해 3.1운동 정신을 기억하고 기념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이후 1922년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김마리아는 김구 선생과 더불어 의원으로 피선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됐다. 이후 임시정부가 노선 차이로 대립하자 김마리아는 1923년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김마리아는 미국 중부 미주리주 캔자스 시에 접한 파크빌 파크 대학를 졸업하고, 1929년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교육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공부와 함께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1928년 뉴욕의 뜻 있는 여성들을 모아 단결과 실력 배양, 외교를 통한 독립 지원을 목적으로 '근화회(槿花會)'를 설립했다.
1932년 7월 20일 김마리아는 9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12년만의 귀국이었지만, 조선 사회에서 김마리아는 '성좌 속 왕좌'로 전설처럼 흠모되고 있었다. 그녀는 원산에 설립된 한국 최초 여성신학교육기관 마르타 윌슨 여자신학원에 자리잡고 폐교당하는 1943년까지 봉직했다.
이곳 성서 과목을 담당했던 김마리아는 핍박받는 민족에게 새 희망을 주는 예언서인 구약 다니엘서와 신약 요한계시록 강의에 열정을 쏟았다. 이와 함께 한국교회의 남녀 차별을 목도하고 기독교 여성운동에 힘을 쏟았다.
김마리아는 1934년부터 4년간 조선장로회 전국여전도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장로회 총회도 결정한 신사참배를 전국여전도회가 거부하도록 지략을 썼다. 일제는 여전도회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배후 조종자로 김마리아를 지목하고, 감시와 압박을 계속했다.
학생들 모두 신사참배에 불응했던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은 1943년 폐교당했고, 일제는 김마리아에게 학교 안에서만 생활하라는 '주거제한령'을 내렸다. 김마리아는 과로와 정신적 압박 때문에 지병이 재발해 상악골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고, 전쟁으로 생필품과 약품이 부족해 신경쇠약으로 이어져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3월 52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2019년 봄학기 홍성강좌는 지난 4월 9일부터 5월 7일까지 매주 화요일 총 5차례 저녁 7시부터 서울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인근 양화진책방에서 진행되고 있다(문의: 02-333-5161 내선 600번, eun@hongsungs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