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인십색(十人十色)인 학생들에게 학습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학습자가 갖춰야 할 자세와 태도, 의지와 목표를 가르치며 배움을 촉진하는 것은 교재와 시설이 당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오직 각 사람의 사정과 상황을 헤아리고 공감할 수 있는 인격적 존재, 즉 교사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 부어 만든 교재와 시설이라고 해도 제대로 된 교사 한 명에 견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같은 교사의 중요성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가는 회당에서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1-22).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의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회당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 중 누군가가 ‘랍비로 보이는’ 예수님에게 가르침을 청한 것 같다. 이 장면에서 마가는 선생님(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 대신 우선 그 가르침을 들은 학생들(유대인들)의 반응에 초점을 맞춘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가르침에 ‘압도당했다.’ “흠, 이 선생님 실력 있는데?” 정도가 아니라 “와! 어떻게 이럴 수가?”라고 입이 쩍 벌어진 것이다. 마가는 이것이 가르친 장소나 내용, 교재 때문이 아니라 가르친 사람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어느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권위로 가르침을 베푼 ‘교사’ 예수님 말이다.
물론 서기관들에게도 율법을 가르칠 권위가 있었다. 그 권위는 모세와 당시 명망 있는 랍비들로부터 온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처럼 가르치지 않으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예수님은 서기관들처럼 “누가 이런 식으로 말하더라”가 아니라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제삼자에게 의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로부터 주어진 자신의 권위로 가르치신 것이다.
서기관들도 안식일에 가르쳤고 예수님도 안식일에 가르치셨다. 서기관들도 회당에서 가르쳤고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서기관들도 율법을 가르쳤고 예수님도 율법을 가르치셨다. 서기관들도 가버나움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예수님도 가버나움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다. 때와 상황과 환경과 교재와 학생이 동일했다. 그런데도 서기관이 가르칠 때는 아무도 입을 벌리지 않았다.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자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말이 당연히 맞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나누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 아니다. 가르친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이유 때문에 서기관들이 가르칠 때와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서로 결과가 다른 것은 당시 율법을 가르치던 교사들에게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 23장).
서기관들은 전통과 전승을 업고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경건한 척만했을 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있기만 하면, 누구라도 예수님과 같은 권위를 갖고 가르치고 훈계할 수 있다(요 14:12). 서기관들이 교사로서 실패한 것은 그들이 신적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을 갖추지 못한 탓이었다.
잘 가르치려면 시설도 중요하고 교재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것을 갖추고 있어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교육 환경은 바로 가르치는 자, 즉 교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