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기리에 방영중인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는 '선교사'가 극의 주요 흐름을 좌우했다. 종살이하던 주인공 '유진 초이(이병헌)'은 어린 시절 쫓기다 선교사 '요셉'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해병대 대위이자 미 공사관 영사대리로 고국에 돌아온다.
그러다 선교사가 의병활동을 도우려다 죽음을 당하자,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던 주인공 유진은 진상을 파헤치면서 의병들에게 더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런가 하면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던 시대, 여자 주인공 '고애신(김태리)'는 선교사가 세운 학당에서 여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우게 된다. 이들 외에도 구동매(유연석), 김희성(변요한), 쿠도 히나(김민정), 이완익(김의성) 등이 등장해 구한말 조선의 생활상 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구한말 선교사들은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 같던 조선인들에게 등불 같은 존재였다. 왕인 고종도 선교사들을 신뢰했고, 선교사들은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의 아픔을 치료했다. 모처럼 대중매체에서 그 시대 기독교를 (있는 그대로) 긍정적으로 보여주는 이 때, 구한말 목숨을 걸고 이 땅에 들어온 주요 선교사들의 이야기들을 책과 문헌, 영상 등으로 돌아보고자 한다.
▲책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
◈아내가 쓴 언더우드 선교사 일대기
'조선에 온 첫 번째 선교사와 한국 개신교의 시작 이야기'라는 부제를 공통적으로 달고 있는 책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이상 IVP)>는 '우리나라 첫 선교사'로 가장 잘 알려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일대기로, 두 선교사가 이 땅에 온 1885년 4월 5일로부터 130년째 되는 지난 2015년 개정판으로 나왔다. 두 책은 모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이만열 박사가 번역했다.
<언더우드>는 아직 우리나라가 '조선'이던 이 땅을 처음으로 밟은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9-1916)의 일대기를, 그와 함께 평생 선교한 아내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가 기록한 것이다. 아내 언더우드 선교사는 당시 조선의 풍속과 정치적 상황 속에서 언더우드를 통해 기독교가 어떻게 한국 사회에 접근하여 성장하고 있는지를 주시하며 서술하고 있다.
아내는 남편을 이렇게 평가했다. "언더우드의 전 생애 가운데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 즉 하나의 지배적인 성격이 바로 사랑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교파나 인종이나 시간이나 장소와 같은 좁은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무한히 넘쳐흐르는 위대한 사랑이었다. 수많은 심령들이 그에게 다가와 사랑의 마음으로 인격적인 헌신을 한 것도, 또 그가 전 생애에 걸쳐 '타오르는 횃불(a torch of fire)'이라 불리면서 일관되게 살아가게 한 것도 그의 이러한 사랑이었다."
▲존 R. 모트 박사 방한시 함께한 한국 선교 지도자들. 언더우드는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자리했다. ⓒ한국컴퓨터선교회 |
잘 알려진 것처럼 언더우드는 뉴브런즈윅 신학교 재학 도중 인도 선교를 꿈꾸다, 이제 막 문호를 개방한 '은둔의 나라(the Hermit Kingdom)'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그곳에 갈 사람을 물색하다,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는 가슴 속 메시지에 응답했다. 20세기 최고의 선교 성공 사례가 된 '한국 기독교'의 시작이었다.
당시 시대상에 대한 묘사를 읽다 보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배경이 얼마나 '보정'을 거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아, 그의 보고서를 읽은 사람들은 조선을 '지상낙원'으로 착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도착한 뒤 많은 시간을 한국어 공부에 할애했고, 다행히 왕실도 외국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우리는 한국어를 조금 알게 되자마자, 바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골목길이나 샛길로 나갔다. 우리는 책을 한 권 꺼내 읽기 시작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들어 질문하면 우리는 그 책과 진리와 그 의미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는 먼저 우리 모두의 공통된 기반을 찾아, 점차 그들이 알고 있는 것에서 모르는 것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한 노력으로 첫 국내 세례자, 노춘경이 탄생했다. 알렌 박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자신은 영어를 배우면서, 그의 서재에서 훔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읽고 진리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고백, 1886년 7월 11일 비밀리에 세례를 받게 된다. 그가 열었던 첫 성경 훈련반 사람 수도 일곱, 첫 세례교인반도 일곱, 첫 졸업반 의사 수도 일곱, 처음 장로회신학교 졸업생도 일곱이었다.
▲한국 성서번역위원회. 앞줄 왼쪽부터 레이놀즈, 언더우드, 게일, 존스. ⓒ서울역사아카이브 |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 외에도 선교 활동을 위해 1년간 했던 의학 공부를 통해 광혜원(廣惠院)에서 진료와 간호를 맡았고, 후일 이름을 바꾼 제중원(濟衆院) 산하 의학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886년 고아원(후일 경신학교)을 설립하고, 1887년 벽지전도부터 시작했다. 그가 온지 3년 뒤 한국에 왔던 릴리어스 호튼 선교사와 1889년 결혼한 뒤, 건강이 악화돼 미국으로 돌아갔다 3년만에 돌아온다.
1897년 서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1889년 문서선교를 위한 기독교서회를 창립한다. 성서 번역에도 힘썼으며, 이를 위한 <한영사전>과 <영한사전>도 출간했다. 1900년에는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했고, 1915년 고아원에서 발전한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만들고 교장으로 섬겼는데, 이는 연희전문학교가 됐다. 병을 얻은 그는 1916년 미국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했다.
한국 개신교복음주의선교회 연합공의회는, 그의 죽음 뒤 이런 조사를 남겼다. "31년 동안 그는 우리의 모든 연합 조직과 기관에서 지도적이고 주된 정신적 위치를 차지했다. 이 선교지와 관련된 일의 대부분이 시작되고 성공한 것은 그의 풍부한 지략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 힘입은 바 크다."
▲불타기 전 언더우드가 기념관 전경. ⓒ크리스천투데이 DB |
◈교육 사업에 큰 뜻 품었던 아펜젤러
<아펜젤러> 역시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같은 날 상륙했던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亞扁薛羅, 1858-1902)의 활동을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 it Nation, 1882)>의 저자이자 동양학자·목회자였던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가 썼다.
아펜젤러 역시 언더우드처럼 드루 신학교에 입학했다가, 졸업도 하기 전 감리교회 외국선교부에 '조선 선교에 헌신할 것'을 고백했다. 1885년 1월 신학교를 졸업하고 엘라 닷지(Ella Dodge)와 결혼한 뒤, 즉시 조선으로 떠났다.
아펜젤러는 신학문에 뜻을 둔 청년들을 모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배재학당(培材學堂)'을 1886년 6월 8일 설립했다. 또 새문안교회와 더불어 한국의 '어머니 교회'인 정동감리교회를 1887년 10월 9일 세웠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요셉 선교사. |
또 우리나라 풍속과 인정을 파악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으로 여행을 다녔다. 1889년에는 최초의 월간지 <교회>를 발간, 국민들에게 민주독립 사상과 민족 의식을 불어넣고자 했다. 서재필·윤치호·이상재 등이 만든 독립협회에도 초기부터 관여했으며, 문서운동과 성서번역에도 힘썼다.
아펜젤러는 1902년 8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차 배를 타고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다른 배와의 충돌사고로 순직했다.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마지막까지 조선인 동행자를 구하려다 함께 익사했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아펜젤러의 뒤를 이어, 그의 자녀들도 선교에 뛰어들었다. 서울 정동 23번지에서 태어난 아펜젤러 2세(Henry D. Appenzeller)는 아버지의 죽음 후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낸 뒤 한국을 찾아 1920년 배재학당 제4대 교장을 지낸다.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눈감아주다 곤욕을 치르기도 한 그는 1939년 일제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교장직을 내놓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1953년 숨을 거두면서 "내가 죽으면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한 유언에 따라, 이듬해인 1954년 10월 18일 지금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
▲아펜젤러 선교사와 배재학당 학생들. |
그의 누나이자 아펜젤러 선교사의 맏딸인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lice R. Appenzeller)도 1909년 웨슬리아 대학 졸업 후 자진해 한국 땅을 찾았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이화학당 교수가 됐고, 1925년부터 18년간 교장을 맡았다. '이화의 상징'이던 아펜젤러는 1950년 2월 20일 예배인도 중 뇌출혈로 쓰러져 별세했다.
역자인 이만열 박사는 아펜젤러에 대해 "여느 선교사들보다 깨끗한 이미지를 남긴 44년의 짧은 생애는 안타깝게도 불의의 사고로 마감됐지만, 아펜젤러가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하고 간 사역에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부채의식을 느낀다면, 그의 짧고 깨끗한 삶이 한국교회에 새로운 선교 열기와 사명 수행의 힘찬 동력을 제공할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아펜젤러는 제물포에 도착한 뒤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남겼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무덤의 빗장을 산산이 부수고 부활한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