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은 보기 좋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포함한 단어를 '우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단어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서로를 돕는 지체와의 만남, 그것이 참된 사람됨이고 우리됨입니다.
2. 그런데 우리라는 단어에 '끼리'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과 밥 먹고, 목사는 목사끼리, 장로는 장로끼리, 청년은 청년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교회는 교회끼리 입니다.
참 좋지 않은 단어 '끼리'가 붙으니, '우리'라는 단어가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3. 한국의 최근 트렌드를 한 마디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젊은이들이 잘 하는 줄임말로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멋진 단어가 만들어집니다. '먹보놀이'입니다.
먹는 것, 보는 것, 놀이 문화입니다. 온통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쇼핑과 보이는 것들의 소중함, 뭘 하고 놀아야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득합니다. '먹보놀이' 세상이 되었습니다.
4. 그런데 그 '먹보놀이'에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 '끼리'입니다. "우리끼리 먹으러 가자", "우리끼리 놀러 가자", "우리끼리 보러가자".
돈 없으면 그 '끼리'에 동참 못합니다. 성격 안 맞으면 끼리에서 제외됩니다. 청소년들에게만 있는 '은따(은근히 따돌림)'는 청년들, 장년들에게는 '대따'가 되었습니다. '대놓고 따돌리기'입니다.
아예 당당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돈 없으면 넌 못가", "넌 너희끼리 놀아. 우린 우리끼리 놀거야".
5. 정말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끼리' 살다 보면, '우리'를 놓친다는 것을요. '우리끼리' 살면 행복할 것 같지만, 결국 '우리'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가 되는 훈련입니다.
6. 솔로몬은 화려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인생 마지막에 이방 민족의 여인들과 통혼하며 인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홀로 섰던 그 순간은 잊고, 이제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는 것이 좋아졌습니다.
에스라는 잃었던 성전을 재건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명이 생긴 것입니다. 결국 성전 재건이 되는 기쁜 소식 뒤에, 기가 막힌 소식이 들립니다. 백성들은 물론, 말씀을 맡은 지도자들까지 이방 여인들과 하나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7. 에스라는 기가 막혀 주저 앉았습니다. 그 때 스바냐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말합니다.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라고 외치며 말합니다.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나는 아내와 결별할 것이요, 자녀들을 보낼 것이요, 하는 고백입니다. 성전을 이루기 위해 "난 혼자 되겠소"라고 말입니다.
6. 성전은 '우리'입니다. 성전은 나 한 사람이 아니라, 사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우리 됨'을 이루는 '성전 됨'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우리 됨'을 이루는 '성전 됨'은 두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 한 분 앞에 서는 연습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혈통이 무슨 상관이고, 친구가 무슨 상관이며 애인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훈련 대신 '우리끼리' 예배드리자라고 현혹합니다.
둘째, 끼리를 제거한 '우리 됨', 즉 내 애인, 내 사랑, 내 가족, 내 자녀보다 공동체가 더 귀해지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핏값으로 사신 교회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다. 그제서야 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셨는지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 둘째 '우리 됨'은, 첫째가 회복된 사람만 이룰 수 있습니다.
7. 저는 목회하면서, 결혼 후 신앙생활이 무너지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연애를 하면서 신앙이 무너집니다. 결혼하면 더 무너집니다. 그냥 사람 따라 다닌다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 안에서 참된 사랑을 잃어갑니다. 그토록 신실했던 친구들도, 연애를 하면서부터 그 한 사람에 맞춰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면서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요. '우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요.
8. 부모님들 가운데 3세대가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주님 뜻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대체 어느 본문에 그런 말씀이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자녀들을 같은 예배당 안에 두고 싶은 자신의 욕망일 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정말 좋은 교회를 다녀야 한다. 좋은 교회는 건물도, 사람이 많은 곳도, 친구들이 많은 곳도, 부모와 함께 있는 곳도 아니란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곳이어야 한단다."
9.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지 못하게 하는 부모는 신앙 교육에 실패한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한다며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결단을 하면서도, 정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혼자가 되는 결단을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어쩌면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살 것 입니다. 충격적인 것은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10. 우리 교회 청년들 대다수는 부모님과 다른 교회를 다닙니다. 부모님들이 다니시는 교회가 거리에서 먼 것도 아닙니다. 저희 교회와 붙어있거나, 그들의 집과 가깝습니다.
이들은 교회에서 참 많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분쟁의 아픔도 겪었습니다. 교회의 환경도 매우 좋지 않습니다. 냄새와 곰팡이가 여기저기 번져 있습니다. 물이 새고, 이제 다시 전기가 누전이 되는지, 불을 꺼도 전등에 불이 들어오는 상태입니다. 당연히 이 나이대 청년들이라면 이곳을 벗어나고 싶고, 사랑하는 부모님과 함께 예배드리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겠지요.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들은 지금 우리 교회를 선택해 다니고 있습니다. 믿음 위에 홀로 서 나간다는 것이 짠하기도 하고, 부모와 다른 교회를 다니면서 부모님들로부터 듣는 아쉬운 소리도 견뎌내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기도 합니다.
12. 그러나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우리끼리' 될까봐서입니다. 넓은 품으로 모든 이들을 아우르는 것이 아닌, 오히려 전도의 사명을 잊고 살지는 않을까. 정말 중요한 '우리 됨'을 이루는 가치를 잃어버린 채 우리끼리만 몰려다니고, 맛있는 음식 먹을 때도 '우리끼리', 좋은것 보러 갈 때도 '우리끼리', 놀러갈 때도 '우리끼리' 살까봐 늘 걱정됩니다.
13. 사실 목사들부터 그렇게 삽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미 그렇게 삽니다. 목사 식탁이 따로 있거나, 목사와 장로님들만 같이 식사를 한다거나.... 그 모습을 본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끼리끼리'가 됩니다.
14. 우리 교회는 교역자실이 없습니다. 그 공간을 청소년부 아이들 공간으로 내어 주었습니다. 주일 점심 식사는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 날 저는 포도나무 주일 손님이 오실 때를 제외하고는 식탁을 혼자 합니다.
어느 교회처럼, '목사 식탁'이라고 귀한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귀퉁이에 있는 책상에서 똑같은 반찬을 놓고 혼자 먹습니다. 그 결정을 한 날,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맨날 같은 사람과 같은 식탁, 우리끼리 밥 먹자 하면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우리끼리의 문화는 밥 먹는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밥 먹는 것, 누가 못합니까?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누구랑 먹으라고 강요는 안 합니다. 하지만 지나다니면서 오늘도 혼자 밥 먹고 있는 저를 보면서, 내가 누구와 같이 밥 먹어야 할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제 함께 밥 먹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 바뀌면, 그 삶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질 것입니다."
14.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굳게 믿습니다. 이 시대의 스바냐 같은 여러분,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와 공동체를 위해 '난 혼자가 되겠다' 결단하는 여러분을 통해, 오늘도 하나님 나라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유한승 목사(생명샘교회)